한국일보

‘마키오카 자매들’

2018-08-17 (금)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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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오카 자매들’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딱 하나만 고르라면 난 서슴없이 곤 이치가와 감독이 만든 ‘마키오카 자매들‘(The Makioka Sisters·1983·사진)을 고르겠다. 2차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1938년 몰락해가는 오사카의 갑부 집 네 딸들에 관한 가족 멜로드라마로 화사하게 아름답고 향수감이 고즈넉하니 배인 작품이다.

원작은 주니치로 다니자키의 ‘세설’(Sesameyuki)로 제목은 봄철 가지에서 눈처럼 떨어져 내리는 사쿠라꽃을 말한다. 그리고 제목에서 ‘눈’이라는 뜻의 ‘유키’는 네 자매 중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셋째인 유키코를 말한다.

소설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출판돼 독자들의 큰 인기를 끌자 검열당국에 의해 ‘온건하고 나약하며 천박하도록 개인적인 여자의 삶을 그렸다’는 이유로 출판이 금지됐다. 작품 인물과 사건들은 작가의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일들을 바탕으로 구성됐는데 소설은 이전에도 두차례나 영화화 했었다. 인본주의자였던 이치가와의 다른 영화들로는 반전영화들인 ‘버마의 하프’와 ‘들불’ 그리고 기록영화 ‘도쿄 올림피아드’ 등이 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사쿠라꽃이 활짝 핀 숲을 카메라가 롱샷으로 잡으면서 시작된다. 첫 장면에서 수줍은 기색의 화사한 사쿠라꽃을 보여준 카메라는 이어 눈 시린 푸른 기모노 차림에 입술에 새빨간 루즈를 바른 네 자매 중 둘째인 사치코(요시코 사카무)의 얼굴을 화면 가득히 클로스업 한다.

사치코를 비롯해 네 자매 중 첫째인 추루코(게이코 기시)와 유키코(사유리 요시나가) 그리고 막내 다에코(유코 고테가와) 및 사치코의 남편 데이노수케(코지 이시자카)는 연례 사쿠라 꽃 구경차 나들이를 나선 것.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내가 어렸을 때 봄이 오면 모처럼 주말에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도시락을 싸들고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복작대던 창경원에 가서 사쿠라꽃 구경을 하던 옛날을 떠올렸었다.

추루코와 사치코는 시집을 갔으나 수줍음 많고 보수적이며 과묵한 유키코는 나이 서른이 되었는데도 아직 미혼이어서 언니들의 속을 태운다. 유키코는 여러 번 선을 보긴 하지만 매번 퇴짜를 놓는다. 그런데 데이노수케는 순수한 유키코를 연모한다.

넷 중 가장 신식이요 반항적인 다에코는 한 때 애인과 사랑의 줄행랑을 놓은 ‘모던 걸’로 집안 전통상 언니가 시집을 가기 전에는 결혼을 할 수가 없어 아예 시집 갈 생각을 포기한 상태. 다에코는 마키오카 가문의 미운 오리 새끼.

마키오카 네는 과거 부상으로 크게 성공, 부와 호사를 누리던 집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운이 기울어가는 처지. 영화는 시대와 사회상과 가치관 및 가족의 전통 등이 변화하고 있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구시대를 상징하는 네 자매가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고요하고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네 자매는 몰락한 귀족사회를 상징하는데 이들의 현대화의 물결 앞에서 과거를 지키려는 안쓰러운 모습이 자매들의 내밀하고 세세한 일상사를 통해 거의 긴장감 감돌도록 무게 있게 묘사된다.

과거에 사는 자매들의 얘기이니만큼 작품 전체에 애잔한 노스탤지어가 고여 있다. 품위와 자존을 잃지 않으려는 이들의 권위의식과 체면과 신분유지의 꼿꼿함이 의연한데 이런 자매들의 양반의식은 이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기모노에 의해 함축성 있게 상징된다.

영화는 기모노와 오사카에 바치는 헌사와도 같다. 카메라가 형형색색의 무늬와 색깔로 물든 기모노를 관상하면서 아울러 이를 입은 아름다운 자매들의 얼굴과 자태를 우아하게 포착한 촬영이 관능적이다. 이치가와는 색깔을 마치 무지개를 채색한 신의 조화처럼 부리고 있다. 봄의 분홍 일색인 사쿠라꽃들과 붉고 노란 가을 단풍 그리고 사방에 가득히 내리는 백설이 마치 살아 숨 쉬는 풍경화처럼 아름답고 몽롱하게 감각적이다.

끝에 도쿄로 전근하는 남편 다추오(‘담포포’ 등을 감독한 주조 이타미)를 따라 이사를 가기로한 추루코의 독백이 우리들의 삶을 잘 대변하고 있다. “계절도 변하고 일들도 벌어지지만 결국 변하는 것은 없구나.” 기품 있고 조락의 비감이 깃든 고운 영화로 가족을 한데 묶는 사랑을 강조한 작품인데 개봉이 되면서 일부 비평가들에 의해 ‘기모노 쇼’라는 평을 들었다. 그런데 이치가와는 기모노상의 아들이다.

‘마키오카 자매들’이 개봉 35주년을 맞아 22일 하오 7시 로열(11523 Santa Monica Blvd.)과 플레이하우스 7(673 E. Colorado Blvd. Pasadena) 및 타운센터 5(17200 Ventura Blvd, Encino) 등에서 상영된다. (310)478-3836.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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