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경제위기의 진짜 주범

2018-08-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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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위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곤 한다. 터키발 경제위기로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자 터키에서 판매되는 명품을 싸게 구매하려는 직구열풍이 한국에서 뜨겁게 불고 있다는 소식이다. 최고급 명품을 몇 달 전보다 75%나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터키에 거주하는 지인이나 터키 온라인 업체를 통해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급증하면서 구매대행 사기를 조심하라는 경고까지 나오고 있다.

터키교민들 전언에 따르면 실제로 명품판매 업소들에는 외국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으며 이 가운데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 교민은 “열흘 전 집을 샀다. 당시 집값을 달러로 환산하면 33만달러였는데 지금은 21만달러가 됐다”고 말했다. 리라화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폭락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마치 IMF 사태 당시 한국을 보는 듯하다.

터키경제의 위기는 올 들어 계속 이어져 왔다. 지난 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터키산 철강에 관세폭탄을 부과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트럼프 발언 후 리라화는 20% 이상 폭락했다.


트럼프의 관세부과는 간첩혐의로 억류 중인 미국인 목사 석방요구를 터키가 거부한 데 따른 보복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중동정책에 고분고분 협조하지 않는 터키를 길들이기 위한 것이란 해석이 유력하다. 트럼프의 정치적 목적이 무엇이었든 터키의 경제위기는 전 지구촌에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터키의 경제위기는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터키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근본적 문제는 경제구조이다. 터키는 해외로부터 좋은 환율로 많은 달러를 들여와 기업들에게 마구 대출해 주는 방식으로 성장을 지속해 왔다. 그 결과 대외부채가 GDP 대비 70% 수준으로까지 높아졌다. 하지만 리라화 폭락으로 달러상환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상황을 한층 더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터키의 정치적 리더십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절대 권력자이다. 그 누구도 그의 생각에 반기를 들기 힘든 분위기다. 문제는 에르도안이 금리인상에 대해 완고할 정도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긴축기조로 돌아서야 했던 상황에서 터키는 적절한 처방을 쓸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터키 재무장관은 에르도안의 사위이다.

이처럼 정치가 경제위기를 부르기도 하지만 그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 또한 정치이다. 진보 경제학자로 뉴욕타임스에 고정 칼럼을 쓰는 폴 크루그먼 교수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연하면서 책임감 있는, 또 유능하고 정직한 정부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크루그먼은 그러면서 불행하게도 에르도안의 터키 정부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고 진단한다.

경제에 대한 이해가 낮으면서 권위적이고 고집스럽기만 한 에르도안. 기축통화국인 미국 대통령으로서 통화위기를 촉발하고도 수수방관하는, 심지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한 트럼프. 독선과 아집에 갇혀있는 두 정치지도자가 만들어낸 경제위기는 그래서 빠른 시일 내에 수습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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