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에어컨 - 그 불편한 진실

2018-08-11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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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이어지니 거리에서 노숙자들이 자취를 감췄다. 출근길에 프리웨이를 나오면 매일 아침인사 하듯 길모퉁이에 서있던 노숙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도로변 언덕기슭에 오래 자리 잡고 있던 텐트도 버려졌다. 10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열기를 길바닥에서 맨몸으로, 얇은 천막 한 장으로, 버텨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들은 어딘가 에어컨 있는 곳에서 보호받고 있는 건지 … 마음이 쓰인다.

지구가 뜨겁다. 20년 전만해도 미국 대부분 지역에서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던 에어컨이 이제는 ‘필수품’이 되었다. 남가주의 경우 한여름에 몇 번 틀면 되던 에어컨을 이제는 매일 틀어야 살 수 있게 되었다. 110년만의 고온이 기록적으로 오래 이어지는 한국에서는 에어컨 전기료가 국민적 이슈가 되었다. 전기료 무서워서 에어컨을 못 튼다는 원성이 높아지니 정부는 대책을 내놓았고, 그러자 그건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 임시방편이라고 다시 불평이 높다.

폭염이 사람을 세 부류로 갈라놓았다. 전기료 따위에는 관심도 없이 에어컨을 펑펑 트는 사람, 전기료 때문에 에어컨을 마음 놓고 못 트는 사람 그리고 에어컨이 없는 사람이다. 이상고온으로 부유층, 중산층, 저소득층이 헷갈리지 않게 정리되었다.


여름철이면 얼음처럼 차가운 우물물로 등목을 하고 나무그늘 밑 평상에 앉아 차게 식힌 수박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던, 그 자연스런 풍경으로부터 우리는 아주 멀리 와있다. ‘자연’을 함부로 무시하며 보란 듯이 ‘인공’을 택한 결과가 우리를 전혀 다른 풍경으로 이끌었다.

인간이 만든 위대한 발명품들은 많은 경우 자연훼손을 전제로 했고, 환경파괴로 이어졌으며, 그렇게 얻은 안락함은 대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크레딧카드로 물건을 왕창 사고 나중에 값을 치르느라 쩔쩔 매듯, 공짜로 이용해도 되는 줄 알았던 자연은 엄청난 청구서를 뒤늦게 내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냉방의 악순환이다.

연방질병통제국에 의하면 미국에서 매년 폭염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은 허리케인, 토네이도, 홍수 등의 천재지변 전체 사망자와 맞먹는다. 단기간에 가장 피해가 컸던 사건으로 1995년 시카고 폭염이 꼽힌다. 그해 7월 닷새 동안의 폭염으로 시카고 전역에서는 거의 800명이 사망했다. 대부분 심장질환 등 지병을 앓던 노인들이 체온이 너무 오르며 신체기능이 마비된 결과였다.

인간의 체온은 화씨 98.6도~100.4도(섭씨 37도~38도)가 적정 온도이다. 온도가 올라가면 인체는 땀을 발산하며 열을 식히는 데, 체온이 104도(섭씨 40도)에 이르면 더 이상 온도조절을 할 수 없게 된다. 폭염 당시 공립병원을 중심으로 에어컨이 없던 병실에서 환자들은 체온이 106도까지 치솟으며 목숨을 잃었다. 빈민지역에서는 에어컨 없는 집안에서 범죄피해가 두려워 창문도 못 열고 있던 노약자들이 줄줄이 사망했다.

대략 7만 명의 사망자를 낸 2003년의 유럽 폭염, 최소한 1만 명이 죽은 2010년 모스크바 폭염 등도 상황은 비슷했다. 대부분 사망자는 지병을 가진 노약자들이었지만 냉방시설이 있었다면 죽음을 면했을 수도 있을 피해자들이었다. 에어컨이 생과 사를 갈랐다.
1980년대만 해도 사치품이었던 에어컨은 건물의 기본요소로 정착했다. 에어컨은 건축 디자인과 우리의 생활양식을 바꾸었다. 고층빌딩에서 창문이 사라지고, 가정집 현관 앞의 포치도 사라졌다. 굳이 창문을 열지 않아도, 포치에 나가 앉지 않아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도심마다 빌딩숲이 이뤄지고 피닉스 등 열기로 활동이 어렵던 남부 지역들에 인구가 몰리고 경제가 발전한 것도 에어컨 덕분이었다.

집안 에어컨-자동차 에어컨-사무실 에어컨으로 철저하게 냉방 관리된 공기 속 생활에 우리는 익숙해졌고 중독되었다. 결과는 미국에서만 연간 5억 톤의 이산화탄소와 냉각제 등 온실가스 방출이다.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으로 에어컨 냉각제는 이산화탄소의 수천 배에 달한다. 세계 인구 1,2위인 중국과 인도에서 에어컨 보급이 급속도로 늘면서 온실가스는 무섭게 증가하고 있다. 지구는 거대한 비닐하우스가 되고 있다.

더워서 에어컨을 틀면 온실가스 배출로 지구온난화가 일어나고 그래서 기온이 올라가면 다시 더 에어컨을 틀게 되는 악순환의 결과가 지금 전 세계를 덮친 폭염이다. 그리고 그 가장 잔인한 진실은 불평등성이다. 폭염이라는 환경재난의 피해가 빈곤층에 집중되는 불평등이다. 자동차도 에어컨도 없어서 온실가스 배출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회취약층이 보호막 하나 없이 폭염에 노출되고 있다.

폭염은 더 이상 기상이변이 아니다. 새로운 현실이다. 환경보존에 대한 재인식 그리고 달라진 환경에서 어떻게 공존할 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화석연료를 가장 펑펑 쓴 환경오염 1등 공신 미국이 파리기후협정에서 탈퇴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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