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효자는 부모가 만든다

2018-08-11 (토) 12:00:00 배광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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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서는 자식들에게 재산을 증여해 주면서 이른바 ‘효도 계약서’라는 것을 쓰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재산을 증여해 주는 대신 자주 찾아와 달라는 등 효도 각서를 받는 거다. 자식의 마음을 돈이나 법으로 붙들어 놓다니! 부모 자식 간에 있어서는 안 될 비윤리적 행위라고 많은 사람들이 통탄한다. 다른 한편에선 씁쓸하지만 나쁘게만 볼 일도 아니리는 시각도 있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듯이 오히려 자식에게 효도를 하게끔 유도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고 가족관계가 돈독해 질수도 있다는 거다.

흔히들 돈이 행복을 갖다 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나도 “돈이란 사는데 불편하지 않은 정도만 있으면 된다. 사람 사이에 돈이 끼면 오히려 인간관계가 소원해진다” 라며 돈에 관해 초연한 척 했다. 그런데 그 돈을 현명하게 사용하여 행복해진 친구를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내 친구 선아는 변호사다. 평생 큰 법률 사무소에서 근무하다 최근에 은퇴했다. 변호사라 돈을 잘 벌겠지만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다만 부자 동네에 위치한 큰 집에서 살았다. 혼자 살며 편하게 지내지 왜 관리하기 힘들게 큰 집에 사느냐고 하면 요즘 젊은 애들이 제집 장만하기 힘드니까 살다가 아들에게 물려주겠다고 했다.


남편과는 일찍 사별하고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산다. 말이 없다가도 아들 얘기를 할 때는 눈이 반짝이고 얼굴에 생기가 돈다. 아들은 LA서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시카고에 있는 대학으로 가더니 아예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최근엔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아 어머니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자주 못 보기에 친구는 아들을 항상 그리워했다.

이제 일을 놓았으니 LA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아들이 사는 시카고로 이사를 갔다. 이곳에 있는 집을 판돈으로 넒은 집을 사주고 아들네로 들어간 거다. 주위 사람들이 극구 말렸다. 아들은 그렇다 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을 좋아 하겠느냐고 말이다. 뿐만 아니라 재산을 몽땅 다 주는 게 아니니 이곳에 작은 콘도라도 마련해 놓았다가 여차하면 다시 이곳으로 오라고 권했다. 친구는 조용히 듣기만 하더니 자기는 그동안 낸 세금으로 죽을 때까지 매달 정부에서 받는 것도 있고 다른 곳에서 나오는 돈도 있어 아들에게 다 주어도 괜찮단다.

장가간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이고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친구가 시카고에 가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던 차에 얼마 전 나를 그리로 초대했다. 아들네 식구가 유럽으로 여행을 간 사이에 자기가 잘 사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나보다.

아닌 게 아니라 친구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LA서와는 달리 얼굴 표정이 밝아지고 활기가 넘쳤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니까 아들이 효자라 자기를 끔찍이 생각해 준단다. 며느리와 한집에서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하니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간섭을 안 한다”고 했다. 며느리가 부탁하지 않으면 어떤 조언도 하지 않고 가끔 옷이나 필요한 것을 사라고 자기 카드를 준다고 한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는 고가의 선물도 사주어 며느리를 기쁘게 해주고 말이다. 내가 보니 청소하는 아줌마 돈도 친구가 주는 것 같았다. 그런 시어머니를 싫어할 며느리가 있을까?

요즘 사회적 통념은 자식에게 미리 재산 물려주지 말 것과 결혼한 자식과는 한집에 살지 말라는 것이다. 친구는 이런 통념을 다 깨고도 행복하게 사니 특별한 경우이다.

그렇게 된 데는 친구의 독특한 인생관 또는 가족관이 관건이 된 것 같다. 조건 없는 자식사랑, 자식이 나에게 효도를 제대로 할 것인가를 계산하지 않고 오직 아들의 행복한 삶만 생각한 거다. 함께 살면 자식 내외, 특히 며느리와의 갈등으로 집안이 평온하지 않다는 속설도 자신의 지혜와 속 깊은 배려로 극복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베풀어 준 돈이 작용 했으리라. 효도 계약서? 효자는 부모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배광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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