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보수의 ‘프레임 정치’

2018-08-0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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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서민’을 앞세우며 출범했던 노무현 정부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던 이슈 가운데 하나는 2005년 발표한 종합부동산세 도입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종부세 도입 방침을 밝히자 보수지와 경제지들은 이를 ‘세금폭탄’이라 지칭하면서 대대적인 비판에 나섰다. ‘세금폭탄’이란 말을 주는 어감은 무시무시하다. 마치 시행된다면 경제가 파탄이라도 날 것 같은 느낌이 엄습한다.

하지만 종부세와 관련한 진실은 ‘세금폭탄’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종부세 대상자는 주택소유자들 가운데 단 2%에 불과했다. 보수언론은 국민들 거의 대다수와는 관계가 없는 세금에 대해 ‘세금폭탄’ 프레임을 뒤집어씌우는 데 성공함으로써 국민들이 정부로부터 등 돌리게 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는 종부세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경우들이 넘쳐난다. 역시 세금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보수주의자들이 상속세에 붙이고 있는 ‘사망세’(death tax)라는 표현이다. 상속세는 수백만 달러가 넘는 거액의 재산을 상속받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하지만 ‘사망세’라고 언급하게 되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모두에게 적용되는 세금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상속세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이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국민의 마음을 놓고 다투는 정치적 싸움은 결국 언어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모든 낱말은 뇌의 프레임 회로를 통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를 듣게 되면 우리 뇌는 프레임에 따라 의미를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연방검찰에 불체자를 언급할 때 ‘서류미비자’(Undocumented) 대신 ‘불법 외국인’(Illegal Aliens)이란 용어를 사용하라고 지시해 논란이 되고 있다. 대다수 언론사들은 ‘서류미비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연방의회 도서관은 2016년 도서목록 주제어에서 ‘불법 외국인’이란 말을 퇴출시키고 ‘비시민권자’(Non-citizen) 혹은 ‘비승인 이민자’(Unauthorized Immigrant)라는 용어를 사용해 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의회도서관에 의해 퇴출된 ‘불법 외국인’이란 용어를 부활시킨 속셈은 뻔하다.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불체자들에 대한 무문별한 단속 등 일련의 반이민 정책들을 정당하고 합법적인 조치로 대중에 각인시키겠다는 것이다.

사실 트럼프는 ‘프레임 정치’의 달인이다. 그는 여론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수단으로 단문의 트윗을 적극 활용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같은 베스트셀러를 쓴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트럼프 트윗 가운데 ‘프레임 선점형’ 내용이 많다며 “트럼프의 소셜미디어 정치는 기막히게 잘 작동한다”고 진단한다.

인지과학은 낱말이 단순할 때 우리의 마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보수는 이런 사실을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트럼프 개인과 그의 행정부가 퍼붓고 있는 프레임 공세가 바로 그런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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