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할머니들이 나섰다

2018-08-04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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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 토네이도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산불로 북가주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많은 것들을 잃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슴 아픈 사건은 일가족 3명의 죽음이다. 레딩 지역 산속에 살던 70세 할머니가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4살, 5살 두 증손주를 감싸 안은 채 함께 숨졌다. 잠깐 외출했다가 아내와 증손주들을 잃은 할아버지는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사건을 뉴스로 전해 들으며 특히 가슴 저려한 사람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그 아이들 사진을 보니 내 손주들 생각이 나더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게 손주들인데” … 어린 손자 손녀를 가진 분들은 낯선 지역 낯선 사람들의 일을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꼈다.

또래 아이들을 보면 바로 내 손주들 같아서 마음이 가는, 공감능력 뛰어난 존재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그중에서도 할머니들이다. 60년 70년 살다보면 아픈 경험 몇 가지 없을 수 없고, 육아와 생업에 묶여 앞뒤 돌아볼 새 없던 삶에서 놓여나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평생에 걸친 희로애락의 담금질로 좋은 일/성공의 덧없음, 나쁜 일/고통의 의미를 터득하며 얻은 삶에 대한 통찰 덕분이다.


생명은 아름답다는 것, 사람은 존재자체로 소중하다는 것, 너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다르지 않다는 것 등이다. 그래서 너의 아픔은 바로 나의 아픔으로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온다.

그런 할머니들이 지금 미 전국에서 조용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단체버스에 올라탄 할머니 시위대가 지난달 31일 뉴욕을 출발해 장장 2,000여마일, 6일 간의 대장정에 나섰다. 그 하루 이틀 사이로 오리건(포틀랜드)에서, 위스콘신(매디슨)에서, 플로리다(탈라하씨)에서, 조지아(애틀랜타)에서… 백발의 시위대 버스들이 출발했다. 목적지는 국경, 텍사스의 맥알렌이다. 불법 이주자들이 가장 많이 구금되어 있는 곳이다.

전국의 할머니들은 그곳에 집결해 트럼프 행정부의 불법이민가족 격리정책을 규탄할 예정이다. 신생 풀뿌리운동 조직 ‘할머니의 응수(Grannie’s Respond, GR)‘의 첫 공식 활동이다.

지난 6월 트럼프 행정부의 밀입국 불관용 정책이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을 때 뉴욕의 비폭력시위 운동가인 댄 아이마-블레어(43)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부모와 떨어져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수용돼 울고 있는 아이들 영상을 볼 때마다 세 살배기 아들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밀입국자라 해도 어린아이를 부모에게서 떼어내는 무자비함을 그냥 두고 봐야 할까, 손주 사랑하는 할머니 마음으로 접근해보면 어떨까 … 동료들과 이런 저런 구상을 하다 나온 것이 GR이었다. “할머니들이 버스에 가득 타고 가서 시위라도 하면 어떨까” 하고 반 농담 삼아 소셜네트웍에 글을 올렸는데 할머니들의 반응이 진지했다. 동참하겠다는 할머니들 그리고 할아버지들이 속속 등장하고, 그 내용이 SNS를 타고 퍼져나가면서 뉴욕에서 시작된 할머니 시위 캐러밴은 서부, 중부, 남부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백발의 이들 캐러밴은 대륙을 횡단하는 긴 여정의 중간 중간 기착지에서 집회를 하며, 동조 여론을 만들고 여론의 물결을 일으키며 남으로, 국경으로 향하고 있다. GR 홈페이지는 이 새로운 풀뿌리운동에 대해 “우리는 사명을 띤 할머니들이다. 폭력과 압제를 피해 목숨 걸고 도망쳐온 이민자 아이들과 가족들을 정부가 너무도 잔인하고 비인도적으로 대하는 데 우리는 격분한다.”고 배경 설명을 하고 있다. “이건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좌나 우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문제, 인류애의 문제다”라고 할머니 운동가들은 강조한다.

‘할머니 캐러밴’ 참가자들의 숫자는 확실하지 않다. 중간 기착지에서 합류하는 사람들도 있고 삼삼오오 개별 승용차로 참가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예닐곱 노선 캐러밴마다 수십명 정도이니 숫자로써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년의 베이비붐 세대가 정치이념을 넘어 할머니(할아버지)로 한마음이 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베이비붐 세대는 7,600만이라는 거대한 숫자로 지난 수십년 미국의 이슈와 추세를 주도해왔다. 은퇴, 메디케어, 소셜시큐리티, 존엄사 등의 이슈가 근년 부쩍 부각된 것은 이 세대의 늙음과 상관이 있다. 은퇴해서 노년을 잘 마무리할 궁리만 하던 이들이 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모았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시위대의 할머니들은 말한다.

“조부모의 역할은 손주들에게 도덕과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부가 이주민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하는 것은 부도덕하고 잘못된 것이다.” “이런 일을 보고도 입 다물고 있다면 어떻게 손주들 눈을 똑바로 보겠는가!” “씨줄 날줄로 얽인 이 사회의 조직과 내 손녀의 미래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정에서 ‘할머니’가 필요하듯 사회에도 ‘할머니’가 필요하다. 지혜와 통찰로 푸근하게 품어 안는 역할이다. 트럼프 시대가 된 후 미국사회의 분열은 깊고 분위기는 냉랭하다. 손주 사랑하는 마음으로 뭉친 할머니 풀뿌리 운동이 이 사회의 냉기를 좀 녹여내기를 바란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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