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떤 사랑의 종말

2018-07-25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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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이 있었다 한들 그게 죽을 일인가? 그만한 일로 목숨을 끊으면 살아도 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돈 4,000만원을 목숨과 바꾸다니… 웬만하면 억~ 억~ 하는 세상인데…”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 하고 있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 활동으로 요약되는 그의 인생여정 내내 사회적 약자, 노동자, 서민들의 편에 섰던 그가 스스로의 소신과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자책이 깊었던 것 같다. 자책으로 괴로워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스스로를 버렸다. 후손도 없으니 훌훌 세상을 떠난 셈이다. 그에게는 자녀가 없다.

세상에는 신념 따로 행동 따로인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그 둘이 일치하는 교과서 같은 사람들이 드물게 있다. 옳다고 생각하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어느 쪽이 더 이익일지 재어보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밀고 나가는 부류이다. 노 전 의원의 경우에는 정치뿐 아니라 결혼도 남들 눈치 보지않고 소신껏 했다. 그의 결혼은 평범하지 않았다.


1970년대~80년대 한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노동운동으로 진화하면서 운동권 사이에서 ‘위장취업’이 유행했다. 대학 재학생이나 졸업생들이 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취직해 노동자들 의식화를 주도하고 노동자권익운동을 전개했다. 경기고 재학시절 10월 유신을 맞으며 반독재 투쟁에 가담했던 그도 같은 길을 택했다. 고려대 재학 중 전기용접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노동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리고 그곳, 노동현장에서 부인 김지선 씨를 만났다.

당시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싸늘했다. 하나의 직업인으로 바라보지 않고 대놓고 비하했다. 노동운동을 하던 ‘위장취업’ 대학생들도 노동자들과 자신 사이의 경계를 온전히 허물지는 못했다.

노 의원의 부인 김 씨는 공장노동자 출신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10대 중반부터 공장 일을 하면서 노동운동에 앞장서게 된 김 씨는 노 의원을 만날 당시 인천지역 ‘노동자들의 큰언니’였다. 1956년생인 노 의원에 비해 나이도 두 살이 많은 김 씨는 여러모로 대졸 남성들이 생각하는 신붓감은 아니었다. 노 의원의 프로포즈를 그는 여러 번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 의원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두 사람은 1988년 결혼했다. 당시 노 의원은 33세, 김 씨는 35세이니 그 시대로는 만혼이었다. 결혼을 했다고 남들 같이 신혼생활을 하지도 못했다. 시위 주도, 불온문서 배포 등의 혐의로 수배가 이어지니 마음 편히 같이 있을 시간도 없었다.

이어 1989년 12월 체포되어 노 의원은 2년 6개월 형을 살고 1992년 출소했다. 김 씨 나이 근 마흔. 아이 가질 때는 이미 지나버렸다. 입양도 고려했지만 2000년대 초반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직업이 변변찮았던 그는 입양부모 자격요건에서 탈락되곤 했다고 한다.

노 원내대표는 노모와 동생가족이 사는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살아생전 그는 “못난 아들 때문에 노모의 고심이 크다”는 말을 했다. 남들처럼 잘 살 수 있을 아들이 노동운동한다고 뛰어다닐 때 그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들 보듯 바라볼 후손 하나 없이 극단적 선택을 한 장남을 보며 노모의 고통은 얼마나 클까.

이로써 젊은 시절 ‘영화 같다’며 회자되던 부부의 사랑도 막을 내렸다. 꿋꿋하게 약자들의 편을 지키며 그가 세상에 품었던 열정도 막을 내렸다. 그렇게 또 한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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