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례라는 공해

2018-07-14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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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험 링컨 대통령은 전해지는 일화가 많다. 주로 자신에게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어이없게 무장해제 시키는 이야기들인데 때로는 위트가 때로는 대의가 촉매작용을 했다.

1858년 링컨이 연방 상원의원선거에 출마했을 때였다. 민주당의 거물인 스티븐 더글러스 현역 의원과 노예제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토론하던 중 더글러스가 그를 ‘두 얼굴’이라고 비난했다. 표리부동하고 기만적인 위선자라는 모욕이었다. 모욕에는 더 심한 모욕으로 맞서는 것이 보통이지만 링컨은 달랐다. 이렇게 말했다.

“그 문제는 청중들에게 맡기겠습니다. 만약 나한테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면, 내가 이 얼굴을 하고 나왔겠습니까?”


한바탕 폭소가 터지고 토론의 주도권은 링컨에게로 넘어갔다. 못 생긴 외모를 거리낌 없이 도마 위에 올려놓는 재치, 모욕적 공격에 일말의 흔들림이 없는 정신력 혹은 내공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무례를 품격으로 받아치는 기품 있는 지도자가 그립다.

지난 몇 주 트럼프 행정부 관리들이 줄줄이 공공장소에서 수모를 당하면서 이 사회에 퍼진 무례함이 이슈가 되고 있다. 국토안보부의 커스텐 닐슨 장관, 새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 스티븐 밀러 보좌관, 스캇 프루잇 환경보호청장 등이 장소와 상황은 달랐지만 모두 식당에 갔다가 식사도 못하고 쫓겨 나왔다. 그들을 알아본 시민들이 “부끄러운 줄 알라!”며 성토한 때문이었다. 식당주인이 “나가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

어린아이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놓는 불법이민 무관용 정책, 환경오염 규제와는 정반대로 나가는 환경정책 등 트럼프정부가 펼치는 제반 정책에 대한 공개적 불만의 표시였다. 그것을 시민의 정치적 의사표현으로 보아야 할지 단순한 무례함으로 보아야할지 의견이 분분하다. 무례함의 원조가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전통적 대통령들과는 너무도 다른 대통령이 취임한 후 사회 분위기가 거칠어졌다. 예의바른 언행과는 거리가 먼, 도무지 대통령스럽지 않은 대통령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중증 자기애를 바탕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미움과 조롱, 경멸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는 그를 한쪽에서는 ‘박력 있다’고 박수치고 다른 쪽에서는 ‘자질 부족’이라며 혐오한다.

대통령이 하루가 멀다 하고 무례한 언동을 반복하니 미국사회가 그를 본받아 온통 무례함으로 오염되었다는 우려가 높다. 무례한 세태를 모두 트럼프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의 인종차별적 반이민 언동들에 자극을 받아 백인우월주의와 인종혐오 범죄들이 준동하는 측면은 없지 않다.

무례(無禮)란 예(禮)가 없음을 말한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갖춰야 할 기본적 예의를 저버리면 무례가 되는데, 예란 인간이 타고 나는 본성이 아니다. 배워 익히며 기르는 것이라고 중국의 사상가 순자는 말했다. 성악설을 내세운 그는 인간이 본래 자기 욕구충족을 추구하는 존재여서 이로 인한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려면 예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도와 규범으로서의 예이다.

서양의 예의, 매너의 핵심은 황금률로 요약된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마태복음의 가르침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존중, 정중함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 시대에 참 낯선 말들이 되었다.


사소한 일에 감정이 격해지고 격앙된 감정을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배설하듯 막말로 쏟아내고 안하무인으로 거칠게 행동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아침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 직장 내, 샤핑센터나 식당 등 어디를 가나 무례한 사람들의 무례한 행동들을 목격한다.

남을 밟고 올라가야 내가 산다는 경쟁강박증, 과정은 어떠하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성과지상주의 등 살얼음판 같은 현실이 우리에게서 남을 돌아볼 여유를 앗아갔을 수 있다. 아울러 트위터, 텍스트 등 순간적 소통방식들이 우리를 인스턴트 반응에 길들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무례함의 특징은 전염성과 독성이다. 친절이 그러하듯 무례 역시 전염성이 강해서 감기 바이러스 퍼지듯 퍼져나간다. 직장 내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 상사가 막말을 하면 직원들 간 무례한 언동이 퍼지고, 이로 인한 불신이 협력을 저해하며 생산성과 창의성 저하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무례로 인한 불쾌감은 분노, 슬픔, 우울감을 일으키면서 심신에 독소가 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무례는 심각한 공해이다. 나의 무례는 더 큰 무례로 누군가에게 전파된다. 경쟁하듯 분노와 조롱을 뿜어내다 보면 조만간 세상은 불쾌감의 독가스 실이 되고 말 것이다. 순간의 분노를 누르는 연습, 평정심을 잃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링컨처럼 무례를 품격으로 받아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친절, 미소, 위트가 종종 해독제가 된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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