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위와 침엽수

2018-07-14 (토) 김완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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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시 ‘신록’이 저절로 읊조려지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요세미티를 찾아갔다.
요세미티는 폭포의 산이 아니라 바위의 산이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폭포수는 장관이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화강암 절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대장바위 ‘엘 캐피탄’의 위용은 꿈같이 현실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세미티는 숲이 더 좋은 산이다.

요세미티 숲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활엽수가 드문드문 나있는 구릉지대를 지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는 촘촘히 들어서고, 더 올라가면 여기저기 침엽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숲이 깊어질수록 침엽수는 밀도가 높아지고 나중엔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침엽수림을 만나게 된다.

활엽수들이 처음엔 띄엄띄엄 헐렁하게 나있다가 높디높게 뻗은 침엽수들이 빈틈이 없을 정도로 들어찬 숲의 모습은 인간의 영혼과 닮았다. 친구가 나를 얕잡아 보았을 때 너는 ‘나를 띄엄띄엄 보는 것 같다’라고 항변한다. 원래 ‘띄엄띄엄’이라는 의태어는 사물의 모양이 가까이 있지 않고 조금 떨어져 비어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사람을 띄엄띄엄 보다’는 어법상 맞지 않지만 사람의 정신 상태나 수준을 낮게 본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인간은 영혼이 고양될수록 깊은 숲속의 침엽수림처럼 빈틈없이 꽉 차고 헐렁하지 않으며 침엽수처럼 올곧고 그 바늘잎처럼 자기 경계에 날카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유혹에 쉬 흔들리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기에 늘 조용하다.

하늘에 닿을 듯 뻗어있는 아름드리 침엽수는 지상에선 천상에 가장 가까이 다다른 영매체리라. 별이 되진 못했지만 지척인 별과 밤마다 수많은 대화를 나눠 실제로 영성이 높은 거목이 되었는지 모른다.

정신적 구도자들도 대개는 산을 찾는다. 산속에서 옛날 말로 도를 닦는다 하고 현대적 표현으론 명상을 한다. 고적한 숲과 심오한 영성(靈性)은 어색함이 없고 잘 어울리리라. 진리나 종교적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은 작게는 자기성찰을 의미한다. 철저하게 자신에서부터 출발해야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우치는 게 아닐까.

한가로이 떠있는 새털구름, 햇살은 따스하나 바람결은 싸늘한 청량한 날씨, 새소리. 시냇물 소리, 숲속의 향기로운 바람... 침엽수림에서 나오는 피톤치드가 더렵혀진 내 영혼을 살균해주는 것 같았다. 반으로 뚝 잘린 하프 돔(Half Dome), 아웃도어 브랜드로 유명한 노스페이스 상표가 되었다는 바위산이다.

빙하의 차가움은 얼마나 서슬 퍼렇기에 거대한 화강암마저 싹둑 잘라내는 것이었을까? 몇 천 년 안으로 안으로 쌓았던 차가움은 칼보다 예리하고 불보다 뜨거웠단 말인가! 순식간에 잘려나간 바위는 울기나 했을까? 바위산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차가움! 후, 불면 사라지는 차가움도 경지에 이르면 바위를 가른다.

우주만물은 강한 것도 약한 것도 없고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하프 돔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지 모른다. 청마 유치환의 “바위”가 떠올랐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바위 전문)


젊은 날 내 심혼을 일깨웠던 시다. 흔들리고 흔들리던 나날들. 흔들리고 싶지 않아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소원하던 날들이었다. 요세미티를 걸으며 누구보다도 청마가 왔다가야 했을 산이라 생각했다. 난 속으로 엘 캐피탄, 하프 돔이 있는 요세미티는 ‘청마의 산’이라 명명했다.

‘고양된 영혼’이란 실체는 저 하얀 바위가 아닐까. 흔들리지 않고, 굴하지 않고, 그리하여 무엇과도 맞서고......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올곧게 뻗은 침엽수는 무생물과 생물의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고양된 영혼의 표상으로 서로 소통하는 사이 인지도 모른다. 아니 오랜 친구였는지 모른다.

<김완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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