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난민과 백정

2018-07-0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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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화척, 혹은 양수척으로 불렸다. 달단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백정으로 불렸다. 도축업을 전문으로 한다. 돗자리 짜는 것이 부업이다. 군역(軍役)에 자주 징발됐고 호환(虎患)이 심할 때는 전문 호랑이 사냥꾼으로도 동원됐다고 한다.

이들은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최하층 민으로 취급됐다. 백정으로 불린 사람들은 외모부터 달랐던 모양이다. 1899년 조선에 상륙한 미국 공사관 서기 W. F. 샌즈는 제물포항에서 처음 목격한 조선의 백정들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들의 모습은 일반 동양인과는 사뭇 달랐다. 눈동자가 회색이나 푸른색 혹은 갈색이었고, 머리칼은 붉고 안색이 좋았으며 키가 180cm를 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얇은 파란 눈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백정은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북방 유목민의 후예라는 것이 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고려시대에는 거란족을 비롯해 북방 유목민과의 전쟁이 빈번했다. 그 때 포로로, 혹은 자진 귀순형식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일부 북방 유목민 난민집단이 화척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세종은 그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백정(본래 의미는 일반 백성)으로 부르게 했다.

조선조정의 그 같은 노력은 그러나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관료와 양반계급부터 이들을 ‘신백정’이라며 차별했다. 양민들도 그 지배계층의 모범(?)을 뒤따랐다.

그 결과 백정은 조선시대 천민의 대명사가 됐고 오늘날에도 누군가를 심하게 모욕하는 욕으로 백정이라는 말은 쓰여 진다. 한민족 공동체와 더불어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주류세력은 그 이주민들을 극도로 차별하고 배제했다. 그 수난사가 스며 있는 낱말이 ‘백정’인 셈이다.

벌집 쑤신 것 같다면 과장일까. 560여명의 예멘인들이 제주도에 들어왔다. 그런데 500만 인구에, 세계 10위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한국 사회가 온통 난리가 난 것 같아 하는 말이다.

그들에 대한 혐오의 언어가 인터넷공간을 타고 넘친다. ‘예멘 난민 수용반대’라는 청와대 청원수용자는 순식간에 50만이 넘어 100만을 바라볼 지경이다. 모처럼 여야도 하나가 됐다. 난민을 한국 땅에 아예 발도 못 대게 하는 의안을 경쟁적으로 내고 있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난민을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테러리즘에, 사회, 경제적 갈등을 겪게 됐다. 유럽 국가들의 오늘날 현실로 반(反)이민은 하나의 흐름이 되고 있는 마당이니까.

‘예멘 난민 반대’의 구호 뒤에는 그러나 다른 요소도 작용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단일민족이다’라는 배타성 민족주의 정서 말이다. 낯선 사람이면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폐쇄적이다. 게다가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면 더욱 굳어지는.

난민 현상은 세계적 추세다. 싫건 좋건 한국도 여기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한국 형편에 맞는 일정 수준의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거기에 또 하나.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본주의가 얼마나 성숙했는지 그 시험대가 바로 난민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말 그대로 인구 5000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으로서 ‘책임 있는 국제사회 일원’임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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