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살에 관한 단상

2018-06-27 (수) 12:00:00 이지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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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관한 단상

이지연 변호사

유감스럽지만 자살의 급증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달 초, 며칠 간격으로 미국의 유명 디자이너와 셰프가 자살을 했다. 그 후 수일간 가는 곳 마다 그들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로 떠올랐고, 접속을 하는 소셜 미디어 마다 그들의 회상이 추모담으로 인용되는 것을 보았다.

생전에 두 사람은 각자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개성과 입지를 구축하며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의 좋은 예로 떠올랐기에 세상은 그들을 단순한 동경과 선망이 아닌 존경과 희망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그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말로는 다소 충격적인 동시에 의문스러웠다. 마치 부와 명예를 다 안겨주는 성공이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매년 찬란한 삶의 표본인 다수의 유명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태어나서 1시간을 겨우 사는 운명이 있고 100년을 넘게 사는 운명이 있지만, 일생이란 것은 항상 유한하다. 과연 어느 순간에 한 사람이 목숨을 스스로 포기해야 할 만큼 삶이 무의미 해지는 걸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지는 순간? 삶이 재미없어지는 순간? 심신의 고통을 견뎌내기 힘들어지는 순간? 자기혐오로 자기 자신이 한없이 못마땅해지는 순간? 사랑과의 단절로 고독함과 외로움이 극단까지 치닫는 순간? 부정적인 감정의 무게가 긍정적인 사고를 압도해버리는 순간? 자살이라는 행위는 소수가 겪는 극단의 결과일까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두 번씩은 감기처럼 막연하게 떠올려보는 일반적인 양상일까.


사전에서는 자살을 불명예, 좌절, 정신질환 등의 이유 때문에 스스로 삶을 끊는 한 개인의 선택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 삶의 질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졌으며 정신질환을 다스릴 수 있는 의학이 상당히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나 정치적으로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자살률이 증가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평균적인 삶과 비교하여 부족함이 없는 듯한 상황에서도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어쩌면 상대적인 비교로 평가되고 남들의 이목에 신경을 쓰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회적 영향 역시 사람들의 불행지수에 한 몫 작용하는 것 같다.

누군가는 경제적인 압박으로 자살을 택하지만 백만장자라고 해서 자살을 피해갈 수는 없다. 주위의 무관심으로 삶을 포기하고픈 이가 있다면 지나친 관심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습관처럼 몸이 아플 때 마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지인이 있고, 불치병에 걸려 진통제로도 고통을 제어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력과 인내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기도하는 지인도 있다. 결국 특정한 이유가 자살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처지를 인식하고 있는 자아와 사고방식이 자살의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터널은 끝이 있지만 동굴은 끝이 없다는 글을 읽었다. 과연 이 세상에 견디기 힘든 굴곡이 없는 삶이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살면서 한 번씩은 겪어야 할 고비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터널 끝의 빛이 보이기를 희망하며 포기하지 않고 전진해야 한다.

하지만 본인의 선택으로 어두움 속을 계속 파고든다면 스스로 나오기로 결심하는 순간까지 동굴의 끝에서 빛을 찾기는 힘들다. 우리는 육신의 건강을 단련시키기 위해 운동을 하며 술과 담배를 끊고 건강식을 챙겨먹는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건강에는 너무나 소홀한 게 아닌가 싶다. 몸에 상처가 나면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는 우리는 정작 누군가가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 할 때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넘어간다. 부정적인 사고방식은 선천적인 성격이 아니라 습관이다. 살면서 항상 빛을 찾을 수 있도록 서로를 돕고, 또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 서로를 사랑하듯,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이지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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