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남해의 숨결

2018-06-23 (토) 김희봉 수필가 Enviro엔지니어링대표
작게 크게
5월의 통영 바다는 어떤 빛일까? 미륵산에서 인 바람은 어디쯤에서 물결을 일으켜 섬들에 닿을까? 한려수도의 섬들은 이순신 수군의 대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지난 봄 통영을 방문했다.

통영이 고향인 박경리는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이렇게 열었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의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 항로의 중간지점으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 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바다는 호수 같았다. 그런데 방파제 안 시장통은 활어들을 가둔 낡은 어항 속처럼 좁고 붐볐다. 그런 북새통 속에서 나는 박경리의 “김 약국”이 어디쯤이며, 청마가 연서를 부쳤던 우체국은 어딘지 두리번거렸다.


남해는 초행길이었다. 충렬사 입구 언덕길에 박경리의 집터가 있었다는 데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김 약국” 골목길은 소설과 닮아 있다. 여전히 궁색하고 좁았다. 세병관과 이어지는 번잡한 길이 소문난 “문학의 거리”다. 청마가 편지를 보내던 통영중앙우체국이 보인다. 우체국 앞 가게가 정인(情人) 이영도 시인이 경영했던 수예점이라고 했다. 낭만적 꽃길이 아니라 치열한 삶터여서 오히려 정이 간다.

“청마 문학관”은 바다가 인접한 정량동 언덕에 있었다. 유치환은 의지적인 생명파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시 <바위>와 <깃발>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의 연시에는 관용과 희생의 숨결이 살아있다. 이기와 소유의 욕망 대신 순애보의 기다림만 녹아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연시 <행복>을 못 잊는 것이리라.

남해 바다 앞 미륵산 남향에 자리한 박경리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2007년 그녀가 마지막 남긴 시 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끝 행이 그녀의 숨결처럼 객을 맞는다. 모두 버리고 떠날 텐데 숨지는 순간까지 소유에 집착하는 우리 인생살이 참 버겁다.

그녀가 평생 아꼈던 물건이 3가지였다고 한다. 재봉틀과 국어사전, 그리고 통영 소목장(小木匠). 재봉틀은 생계, 사전은 문학, 그리고 소목장은 그의 예술적 반려였다고 한다. 박경리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토지’ 같은 대작은 없었을 것이다. 82세 폐암으로 별세한 지 꼭 10년째다.

다음날 아침, 한산섬으로 떠나는 철선 페리를 탔다. 갑판에 오르니 바람이 드세고 구름이 낮게 드리웠다. 이 좁은 물길이 한산대첩을 이룬 그 격전지란 말인가? 울창한 소나무와 동백 숲으로 덮인 한산섬은 한산하고 그윽했다.

정확히 425년 전,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한산섬으로 진을 옮겼다. 임진왜란이 난 이듬해(1593년)였다. 그 후 연전연승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그러나 백성들의 추앙을 시기한 군주는 4년 뒤 그를 파직하고 고문한다.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으스름 달빛이 수루를 비추는데 잠을 들지 못하여 시를 읊으며 밤을 새웠다.”

수루 위에 오르니 장군의 시가 현판에 걸려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후임 원균의 수군은 칠천량에서 전멸했다. 그러자 군주는 황급히 장군을 찾았다. 백의종군하던 그는 장계를 올렸다. “신에게는 배가 12척이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해 항전하겠나이다”. 아흐레 뒤, 명량 해전에서 대승했다. 150척이 넘는 적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일기에 “참으로 천행이다”라고 썼다.

미륵 산정에 올랐다. 한려수도가 전쟁 상황판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정상 가까이 옛 봉화터가 있다. 봉화꾼은 여기서 수시로 전황을 지휘부에 알렸으리라.

섬과 섬들이 나누는 이야기, 물길의 숨소리, 거센 바람의 함성 소리, 싸움터의 비명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처럼 바람 심하게 부는 날, 건너 노량 바다에서 장군이 마지막 몰아 쉬는 숨소리도 들었으리라. 그리고 그는 눈물을 뿌리며 애도의 봉화를 올렸을 것이다.

<김희봉 수필가 Enviro엔지니어링대표>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