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백기 든 트럼프

2018-06-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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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대문 근처에는 유대인 학살 기념관이 있다.

2005년 5월 10일 제2차 대전 종전 60주년을 맞아 세워진 이 기념관은 4.7 에이커 넓이에 묘비를 연상시키는 2,711개의 콘크리트 스텔레가 나치 시대 비극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하에 설치된 ‘정보의 방’에는 나치에 의해 살해된 300만 유대인의 명단과 그들이 남긴 일기와 편지, 사진들이 보관돼 있다.


이는 희생자들이 단지 통계가 아니라 한 때 우리와 똑같이 살아 숨 쉬던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 중 한 여성이 남긴 편지를 보면 어린 자식들과 함께 끌려온 사연이 적혀 있다. 나치는 가족이 잡혀 온 경우 같이 둘 것인지 나눌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이 여성은 자식이 자신과 함께 있으면 극심한 노동을 해야 할 것을 우려해 “아이가 너무 어려 일을 할 수 없다”며 분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치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며 그 여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잠시뿐이었다. 나치에게 일 할 수 없는 인간은 밥만 축내는 식충으로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부모에게서 분리된 아동들은 즉시 개스실로 보내져 한줌의 재로 변했다.

나치가 저지른 만행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 최악을 꼽으라면 죄 없는 아이들을 부모와 생이별시켜 그 유해조차 찾지 못하게 만든 것일 것이다.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 기념관을 만들고 강제 수용소를 없애지 않고 역사 교육의 도구로 쓰고 있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은 물론이다.

다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이런 일이 도널드 트럼프 치하의 미국에서 최근 일어났다. 밀입국을 막는다는 이유로 국경에서 체포된 라티노 가족들에게서 울부짖는 어린 자녀를 강제로 떼어내 분리 수용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법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방 의회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은 한 술 더 떠 사도 바울을 인용해 가며 “하나님이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명한 정부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인간은 바울만 알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 말씀은 모르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트럼프의 주장은 수많은 그의 말과 마찬가지로 거짓임이 곧 드러났다. 20일 스스로 가족 분리를 중단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이 명령은 2,300명의 아동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놓으면서 가족 분리를 포기할 경우 미국 국경을 밀입국자에게 개방하는 것과 다름없다던 그의 종전 주장을 180도 뒤집은 것으로 사실상 백기 투항한 것이다.


트럼프의 가족 분리 정책은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내에서도 폭넓은 비판을 받았다. 오죽하면 아내 멜라니아마저 다른 전직 영부인과 함께 이를 비판했겠는가. 트럼프가 입장을 번복한 것은 멜라니아에 이어 세 아이를 둔 딸 이방카까지 가족 분리에 반대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나치는 유대인을 박멸하면서 이들을 아리아 민족의 영토인 독일에 기어들어와 사는 “해충”이라고 불렀다. 트럼프는 밀입국자들에 의해 미국이 “감염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사고방식이 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나치 독일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트럼프 같은 인간 덕이 아니라 그를 비판 감시하고 인도주의적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과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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