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죽음보다 캄캄한 삶

2018-06-16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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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산에 올랐다가 바위틈에서 본 여린 풀꽃이 생각난다. 산길 옆으로 절벽을 이룬 바위들 사이 좁은 틈으로 어떻게 씨앗이 날아들었는지, 씨앗은 어떻게 흙을 찾고 물을 찾아 싹을 틔웠는지, 뿌리 내리고 줄기를 뻗어 꽃까지 피웠는지 … 생명력이 감탄스러웠다. 그렇게 기어이 살아내는 것이 생명인데, 그런 생명의 본능을 뚝뚝 끊어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자살이 유행병처럼 스멀스멀 미국사회에 퍼지고 있다.

싱가포르 북미회담에 한인사회의 관심이 온통 쏠려있던 6월의 첫째 주, 미국사회를 사로잡은 이슈는 ‘자살’이었다. 충격적인 자살사건이 두 번이나 연속으로 터지고,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연방 질병통제국(CDC)의 자살증가 현황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유명 패션브랜드 설립자 케이트 스페이드의 자살 소식은 지난 5일 아침에 전해졌다. 디자이너이자 사업가 스페이드는 동화 속 성공스토리 같은 인생을 살았다. 마드모아젤의 패션기자로 일하며 익힌 디자인 감각으로 1993년 케이트 스페이드 핸드백 회사를 설립하고, 연인이자 동업자와 결혼하면서 그는 서른 즈음에 일과 사랑을 모두 거머쥐었다.


사업은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2006년 거액에 회사지분을 판 후 그는 10년 간 전업 엄마가 되어 딸 키우는 데 전념했다. 타고난 재능, 사업성공과 부, 엄마로서의 재미 등 여성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것들을 모두 가진 그가 55살에 목숨을 끊었다. 미국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흘 후인 8일, 앤소니 보데인의 자살 소식이 날아들었다. 스페이드가 브랜드로 친숙하다면 보데인은 얼굴로 친숙한 인물이다. 스타 셰프이자 베스트셀러 저술가인 그는 CNN의 음식 여행 프로그램인 ‘미지의 영역(Parts Unknown)’ 진행자로서 서울을 방문해 한국의 고기 집, 노래방 등 회식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훤칠한 외모에 위트 넘치던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전 세계 120개국을 누비며 낯선 음식과 문화, 사람들을 만나고 탐구하며 소개했다. ‘음식세계의 원조 락 스타’로 불리던 그가 62살을 3주 앞두고 ‘미지의 영역’을 촬영 중이던 프랑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성공과 부, 명성을 원 없이 누리며 완벽하게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 목숨을 끊은 걸까. 성공의 피라미드 맨 밑바닥에서 아등바등 개미처럼 사는 대다수 우리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들의 죽음으로 분명해진 사실들은 있다. 삶이란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다는 사실, 인간의 내면은 복잡하고도 복잡해서 성취가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 다 가진 것 같은 사람들도 홀로 싸워야할 자신만의 고통이 있다는 사실, 그러니 결국 삶은 거기서 거기, 마음먹기 달렸다는 사실이다.

지난 6일 CDC 발표에 의하면 1999년에서 2016년 사이 미국에서는 자살이 25% 이상 증가했다. 2016년 기준, 연간 4만5,000명이 자살한다. 사망원인으로 10위가 되면서 자살은 미국 공중보건의 중대한 이슈로 부상했다.

자살의 원인으로는 보통 관계, 재정, 질병이 꼽힌다. 실연 이혼 사별 등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파산이나 실직으로 살 길이 막막할 때, 불치병으로 고통이 극심할 때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외부적으로 도무지 자살할 이유가 없는 경우들도 있다. 우울증, 불안증 등 정신의 문제이다.


며칠 전 LA 타임스에 한 여성의 기고문이 실렸다. 시인이자 대학강사인 그는 자살 직전까지 갔던 경험을 소개하며 우울증이라는 괴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괴물에 사로잡히면 모든 이성적 판단을 잃게 되어서, 성공이나 돈 같은 외부적 요인들은 전혀 소용이 없다고 했다. 정신적으로 캄캄한 터널에 갇히게 되는데, 터널을 끝이 없고 점점 좁아져서 여기서 벗어날 길은 하나, 자살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해방으로서의 죽음이다.

케이트는 오래 전부터 우울증과 불안증 치료를 받아왔다고 그의 남편은 공개했다. 남편과 별거한 지 10개월, 혼자 있던 어느 순간 그에게 극한의 정신적 고통이 밀려들었을지 모르겠다.

쾌활하고 자신만만했던 보데인 역시 어두운 시절들이 있었다. 20대 때 마약에 심하게 빠졌었고, 2005년 첫 부인과 이혼한 직후 삶의 목표를 잃고 술과 마약에 빠져 밤마다 자살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그는 털어놓았었다. 그의 안에 웅크리고 있던 괴물이 이번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벌떡 일어나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 같다.

삶이 죽음보다 캄캄하고 두려운 시간들이 있다. 자살한 사람이 한명이라면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실행하지 않은 사람은 280명 정도 된다는 통계가 있다. 그만큼 절망의 경험은 드물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연결의 힘으로 그 고비를 넘어선다. 신앙으로 형성된 신과의 수직적 연결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관심과 사랑으로 이어진 수평적 연결이다. 한번의 전화, 한번의 만남이 누군가를 살리는 기적이 될 수도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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