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언어와 바둑

2018-06-16 (토) 김완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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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에서 바둑알은 둥근 모양처럼 그 힘을 사방팔방으로 발휘한다. 좌우 앞뒤가 따로 없다. 오늘, 바둑을 두면서 문득 언어도 바둑알과 같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됐다. 언어란 관념을 구상화시킨다면 정사각형 벽돌이 아니라 바둑알 같을 거란 얘기다.

아내는 ‘신중하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고 조용한 말투와 점잖은 몸가짐은 신중이라는 사전적 의미처럼 가볍게 행동하지 않고 조심스럽다. 경솔하지 않기에 누구보다도 믿음이 간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동행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신중하다’는 말의 사방팔방을 보면 소심하고 과감성이 부족하고 모험심이 없으며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단어를 말하면 우리는 대개 습관적으로 사전적 의미만 떠올린다. 이것은 우리가 언어는 실재를 반영한다는 플라톤의 잘못된 언어관을 2,000여 년 동안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언어는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적 약속일뿐이라는, 100여 년 전 소쉬르(1857-1913, 스위스 언어학자)의 언어적 탐구를 체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아내가 왜 자기에게 ‘이쁘다’는 소리를 한 번도 안하느냐고 물었다. 참으로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쁘다의 사전적 의미는 ‘눈으로 보기에 좋고 사랑스럽다’이다. 이 말 속에서는 남녀의 수직적 관계가 숨어 있다. 동등한 관계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사내가 여자를 일방적으로 귀여워하는 시혜적 관점이 감춰져 있다.

혹 아내에게 애첩기질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아내를 존중하고 존경하지 이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아내의 여성스러운 매력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아내는 피부가 유난히 희고 깔끔해 단정해 보이는 사람이다. 단아한 몸피도 여성으로의 매력이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아내와 동등한 인격체로서 감히 ‘이쁘다’란 말은 떠올릴 수 없었다. ‘이쁘다’는 말 속에는 성적으로 소비되는 여자만 있지 여성이란 인간, 인격체는 없다.

그러나 ‘아름답다’란 말은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 이것은 성적이기보다는 인격적인 의미를 많이 담보하기 때문이다. ‘이쁘다’는 말은 여성에게만 국한되지만 ‘아름답다’는 말은 남성도 아우를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은 여성도 되지만 남성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인 아들은 ‘대범하다’. 운동을 해서 그런지 여간해선 쫄지 않고, 소심하지 않으며 너그럽고 여유로우며 자신감이 넘친다. 허나 이 대범함 속에는 치밀하지 않고 무모하며 섬세하지 않다는 뜻이 들어있다. 또한 ‘민첩하다’. 모든 일을 망설임 없이 속전속결하여 시원시원지만 그만큼 거칠고 실수를 많이 한다는 것도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언어의 양면성이다. 즉 겉뜻과 속뜻, 앞모습과 뒷모습이 매우 다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언어의 불완전성이다. 언어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간단한 예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다.

‘강아지’란 단어를 보면 우리는 똑같은 강아지를 떠올리는 게 아니다. 난 강아지 하면 항상 우리 집 개를 생각할 테고 다른 사람 역시 강아지 하면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개를 떠올릴 것이다. 내가 떠올리는 강아지와 다른 사람이 떠올리는 강아지가 다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어나 말은 절대로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 지시대상을 가리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강아지라는 단어를 보고 떠올리는 것은 실존하는 지시대상이 아닌 개념(이미지)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의도를 언어를 통해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에 언어만큼 불완전한 도구도 없기 때문이다. 고로 말은 되도록 적게 해야 하며 쉽게 해서도 안 된다.

하여튼, 사전은 언어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다는 것을 뜻밖에도 바둑을 두며 깨달았다. 햇살처럼 퍼져갈 수 있는 언어의 울림을 파괴한다는 것, 더 넓게 확장될 수 있는 언어의 의미망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내게는 사전이 없다. 앞으로도 사전을 갖지 않을 것이다.

<김완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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