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전 포고 없는 전쟁

2018-06-15 (금) 윤재현 미 국방군수청 안전감사관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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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 포고 없는 전쟁

윤재현 미 국방군수청 안전감사관 은퇴

큰일 날 뻔했다. 지난 부활절 날 장인과 장모 묘지가 있는 로즈 힐 공원을 방문하려고 프리웨이 카풀 차선을 달리고 있었다. 로즈 힐 출구 표시가 나왔는데,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풀 차선에서 서둘러 나가느라 신호를 주며 두 차선을 건너서 가장자리 차선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트레일러 화물차가 경적을 울린다.

깜짝 놀라 차선 바꾸기를 포기하고 다음 출구로 나가서 우회전을 두 번하여 로즈 힐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 큰 화물차에 받혔으면 우리 차는 박살났을 터이다. 순간의 방심으로 아내와 나는 묘지로 직행할 뻔했다.

매년 미국에서 운전 부주의로 4, 5천명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다친다고 한다. 운전하면서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텍스트를 주고받고, 책을 읽고, 음식을 먹거나 마시고, GPS 장치를 만지작거리고, 심지어 화장하는 여자도 있다. 위와 같은 운전 부주의는 법으로 다스리지만, 공상이나 방심운전을 어떻게 방지하나. 사람의 생각을 통제할 수는 없다.


운전은 집중해야 하는 작업이다. 순간의 방심도 위험하다. 로즈 힐을 다녀온 후 나는 핸들 위에 ‘운전/운전’이란 표어를 써서 붙였다. 운전할 때는 딴 생각하지 말고 운전만 하라는 경고다.

미국에 이민 와서 나는 몇 건의 가벼운 차 사고와 수많은 사고 미수를 경험했다. 돌이켜보면 원인은 모두 부주의였다. 방심운전이었다. 충격적인 체험을 고백한다. 시애틀에 갔을 때였다. 프리웨이 진입로로 들어가다가 역주행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후진해서 나왔다. ‘진입 금지’ 표시를 못 본 것이다. 출구로 나오는 차가 있었으면 정면충돌할 뻔했다.

우리는 타인의 실수와 부주의를 고려하고 방어운전을 해야 한다. 방어운전이란 내가 진입 금지 표시를 못 본 것처럼 남의 불안전한 운전이나 행동을 예상하고 준비태세로 운전하는 것이다. 주거지역에서 어린이가 공을 잡으려고 차량 통행로 가운데로 뛰어나올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운전하는 것이 방어운전이다.

북한의 산간벽지에서 태어난 나는 달구지를 사용하여 산에서 땔 나무를 실어 날랐다. 두 바퀴가 달린 달구지를 가파른 언덕에서 몰고 내려오다 소고삐를 놓치면 바퀴에 치어 부상당하거나 죽는 사고가 가끔 있다. 그래서 달구지를 가지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는 것은 ‘사지(死地)밥’ 보따리를 가지고 간다는 말이 있다, 시신을 염할 때 저승으로 가면서 배고프지 말라고 사지 밥을 입에 넣어준다. 나는 요즘도 사지 밥을 지닌 심정으로 운전한다.

매일 차량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있다. 지난 달 오리곤 주에서 한인 일가족 8명 가운데 4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중상을 입은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우리는 선전 포고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윤재현 미 국방군수청 안전감사관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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