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되풀이 되는 역사 이야기

2018-06-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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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 대한민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남북 특사 실무 접촉에서 북한 대표로 나온 박명수가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며 협박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1993년 북한이 영변 핵 사찰을 거부하고 핵확산 금지 조약(NPT)을 탈퇴하면서 미국이 레드라인으로 보고 있는 핵 연료봉까지 교체하자 미국에서는 무력으로라도 북한 핵 개발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94년 5월 18일에는 클린턴 행정부는 전직 고위 장성들을 불러 제2 한국전 가능성을 논의했으며 6월 14일에는 장관급 회의에서 영변 핵 시설에 대한 폭격 방안이 구체적으로 거론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만나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텄다. 그 결과가 그해 10월 제네바에서 체결된 핵 협정으로 북한은 핵 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협정이 체결되자 한국과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환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1차 북핵 위기는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 했다. 2000년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한반도 평화는 공고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과 2년 뒤 제2차 북핵 위기가 발생한다. 2002년 북한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특사가 북한이 제네바 협정을 어기고 몰래 핵 실험한 사실을 추궁하자 북한이 NPT를 탈퇴하면서 한반도에는 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 위기는 2005년 6자 회담을 통해 해결되는 듯 보였다. 2005년 9.19 선언을 통해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빠른 시일 내 NPT와 국제 원자력 기구에 복귀해” 사찰을 받을 것을 약속했으며 대신 미국은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은 2006년 1차 핵실험을 강행하며 그 후 2017년까지 6차례의 핵 실험을 계속해 핵 무장을 완성한다. 김정은 집권 후 한 것만 4번이다. 그리고 김정은은 올 4월 핵폭탄과 이를 운반할 로켓이 완성됐다며 실험장 폐기를 선언한다.

지난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은 예상대로 ‘성공리’에 끝났다.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북한의 약속을 얻었고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합의문 내용에는 미국이 수없이 강조해온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 폐기”라는 말이 빠졌고 타임테이블도 없다. 내용 면에서는 핵 동결과 사찰을 명시한 제네바 합의나 9.19 선언에 못 미친다.

일부에서는 이번 회담을 양국 정상의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첫 걸음이라며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94년 제네바 합의도 양국 정상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협정이었다. 이번 회담이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양국 지도자가 만나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합의문보다 중요한 것은 회담 후 기자 회견 장에서 트럼프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한미 합동 훈련 중단이다. 트럼프는 “비용이 많이 들고”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군사 훈련 옵션을 즉석에서 포기했다. 이런 식이라면 어느 날 일방적인 주한 미군 감축 통보도 없으리란 법이 없다. 한국 정부 여당과 일부 국민들은 이번 회담을 쌍수를 들고 반기고 있으나 이것이 과연 좋아하기만 할 일인지 곰곰이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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