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통역의 어려움

2018-06-1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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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워싱턴 D.C.에서 미소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였다. 미국과 소련이 오랜 냉전을 종식하기 위해 수년에 걸쳐 협상을 진행한 끝에 마침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미국을 방문했다.

적국의 수장을 맞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공식 환영식에서 그의 방문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는 환영사를 했다. 고르바초프의 방문은 “우방들이 아니라 적(adversary)들이 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니” 그만큼 특별하다는 의미였다. 훌륭한 환영의 인사였다.

그런데 레이건의 연설을 러시아어로 옮기던 통역사는 순간 곤혹스러워졌다. 영어의‘adversary’는 그냥 점잖게 ‘적’이라는 표현이지만, 러시아어로 직역하면 ‘protivniki’가 되면서 ‘protivniy(구역질나는)’와 너무 발음이 비슷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통역사는 ‘적’이라고 직역하는 대신 ‘경쟁상대’라는 러시아 단어를 사용했다. 고르바초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정상회담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통역사의 순간적 기지가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오해를 막은 셈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세계적 관심을 모으고 끝났다. 관심 받기 좋아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만으로도 기분이 흡족했을 것이다. 사상 처음으로 정상국가의 정상으로 대접받은 김정은 위원장도 감회가 특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회담의 의미가 클수록 압박감이 큰 사람들이 있다. 바로 통역사들이다. 정상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무게가 엄청나서 한마디 삐끗 잘못 통역했다가는 상상도 못할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 이목이 집중되는 정상회담일수록 통역사들은 피가 마를 지경이라고 한다.

이번 미북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의 통역을 맡은 국무부 소속 이연향 통역국장, 그리고 북한의 김주성 외무성 통역관도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잖아도 통역사들이 애를 먹는 인물이다. 어법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BBC 방송의 페르시아어 통역사가 그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문장들이 짧고, 그 마저 중간에서 뚝뚝 끊어지고, 기분 따라 말을 하기 때문에 전체적 의미 파악이 어렵다는 것이다.

아울러 어떤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말할 때 ‘terrific‘ ’beautiful‘ ’wonderful‘ 등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를 줄줄이 나열하고, 말 중간에 생각할 시간을 버느라 ‘그래요, 내 말이, 그렇다니까…’ 등의 표현이 이어지는 것도 통역사들에게는 부담이다. 내용 없는 말들이니 통역하기도 그렇고, 안 하자니 청중들은 통역에서 뭔가 빠진 것같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통령들 중에서 통역사들이 가장 애를 먹은 인물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발음이 부정확한데다 실수도 잦았기 때문이다. 취임 초기 내외신 기자회견을 할 때였다. 대통령이 “간행과 … 간습은 … ”이라고 말을 시작하자 통역사는 순간 진땀을 흘렸다고 한다. 도통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것이 ‘관행과 관습’이라는 사실을깨닫고는 무사히 통역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YS가 퇴임 후 미국의 한 대학에서 강연할 때는 ‘시너지 효과’를 ‘나머지 효과’로 잘못 읽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 연설문을 미리 받아본 통역사가 원래 원고대로 통역해서 별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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