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레이트 와이트 호프’

2018-06-08 (금)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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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와이트 호프’
최근 트럼프대통령이 특별사면한 사람들 중에 독특한 인물이 1946년에 사망한 미 프로권투 사상 최초의 흑인 챔피언인 잭 존슨(사진)이다. 존슨은 1913년 ‘비도덕적인 목적’으로 백인애인으로 창녀인 벨 슈라이버를 주 경계를 넘어 수송했다는 혐의로 재판 끝에 1년형에 처해졌다. 그 후 존슨은 국외로 도주했다가 1920년에 귀국해 10개월 옥살이를 했다.

존 맥케인 상원의원도 지지하는 존슨에 대한 사면요청은 조지 부시대통령 때부터 있어왔는데 인종차별주의자로 비판 받는 트럼프가 그를 사면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트럼프가 존슨을 사면한 이유 중에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판을 피해보고 아울러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가 거부한 것을 자신이 했다는 것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다분히 포함돼 있다.

백악관에서 있은 사면발표에는 전 헤비급 챔피언 레녹스 루이스와 ‘록키’ 실베스터 스탤론 등이 참석했는데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오바마가 거부한 것을 내가 했다”고 뽐냈다고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 한편 스탤론은 존슨의 이야기를 영화화 한다고 발표했다.


존슨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극적인 것이었다.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백인 적수들을 계속해 때려누이고 1908년 미 최초의 흑인 챔피언이 됐는데 이로 인해 백인들은 존슨을 제압할 백인들의 위대한 희망인 ‘그레이트 와이트 호프’(The Great White Hope)가 나타나기를 갈망했다.

그 ‘위대한 희망’으로 선발된 사람이 은퇴한 헤비급 챔피언 제임스 J. 제프리즈. ‘세기의 대결’이라 불린 존슨 대 제프리즈의 경기는 1910년 7월 네바다 주 리노에서 열렸는데 제프리즈는 존슨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15회 TKO 패했다. 존슨이 이 후에도 백인상대를 계속해 때려 누이자 열 받은 백인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것이 두려운 미연방의회는 1912년 프로권투경기영화를 주 경계를 넘어 운반하는 것을 금하는 법까지 통과시켰었다.

존슨은 흑백차별이 극심하던 당시로서는 흑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자기 할 말은 하면서 자기 신분과 위치를 과시한 사람이었다. 주먹 힘이 세고 권투기술이 빼어났을 뿐 아니라 지능이 간교할 정도로 뛰어나고 백인여자들을 아내와 애인으로 삼는 바람에 백인들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는 “나는 노예가 아니다. 나는 그 누구의 지시도 안 받고 내 짝을 고를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면에서 존슨은 무하마드 알리의 대선배인 셈이다.

존슨의 삶은 이미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졌다. 먼저 만들어진 것이 1967년에 나온 연극 ‘그레이트 와이트 호프’. 잭 존슨은 잭 제퍼슨으로 이름으로 나오는데 역은 거구에 굵은 바리톤 음성(‘스타 워즈’의 다트 베이더 음성)을 지닌 제임스 얼 존스가 맡았다. 그의 첫 백인 아내 에타 테리 듀리에는 엘리노어 박만이라는 이름으로 제인 알렉잰더가 역을 맡았는데 둘 다 토니주연상을 탔다. 하워드 새클로가 쓴 연극은 퓰리처상을 탔다.

알리는 이 연극을 보고 존스에게 “이것은 내 얘기다. 백인여자들을 종교문제로 대치한다면 그 것은 내 얘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종교문제는 알리가 무슬림 양심적 거부자로서 군 징집을 거부한 것을 뜻한다.

마틴 릿 감독은 1970년 연극을 바탕으로 동명영화를 만들었다. 제임스 얼 존스와 제인 알렉잰더가 역시 주연을 맡았는데 둘 다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었다. 제퍼슨의 백인 도전자들을 때려누이는 선수로서의 삶과 유죄선고와 국외도주 그리고 아름다운 백인 여인 박만과의 기복이 심한 로맨스 등을 흥미진진하게 그렸다.

그런데 존슨의 아내 듀리에는 남편의 잦은 구타와 심한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1912년 권총 자살했다. 존슨은 가정폭력자로 알려졌다. 이것이 과거 대통령들이 존슨의 사면을 거부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링 안팎에서 백인 적수들과 맞서 싸운 투사다.

트럼프도 말했듯이 존슨의 옥살이는 인종차별로 인한 불의에 의한 것인데 이런 인종차별은 존슨의 옥살이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세가 등등한 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최근 트럼프 지지자인 코미디언 로잰 바가 오바마 대통령의 전 보좌관이었던 흑인 발레리 재렛을 “무슬림 형제와 원숭이 사이에서 나온 아기”라고 야유한 것만 봐도 미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상존하는 차별의식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이에 로잰 바의 시리즈 ‘로잰’을 방영하는 ABC-TV가 대국민사과를 하고 시리즈를 전격 취소하자 트럼프는 ABC는 비판하면서도 로잰의 발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내게 “인종차별은 어릴 때부터의 교육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한다. 그 것은 자기 것과 다른 것에 대한 생태적 거부반응이라고 본다. 미국의 한국 사람들은 소수계로서 인종차별의 피해자 의식을 내세우곤 하지만 우리는 과연 타 인종에 대해 가해자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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