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주에서 만난 그리스 로마

2018-06-02 (토) 배광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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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말리부 비치 해안가 언덕에 위치한 게티 빌라에 다녀왔다.

빌라에 도착해서 차도를 따라 뮤지엄으로 올라가는데 우선 도로부터가 각지고 편편한 돌로 포장한 로마의 국도를 연상케 했다. 뮤지엄 건물과 정원은 AD 79년 베수비오 산의 화산분출로 잿더미에 묻힌 거대한 귀족의 저택 파피리 빌라(Vila dei Papiri)를 8분의 1로 축소해서 건조했다고 한다. 줄리어스 시저의 아버지 저택이라고 알려진 빌라다. 규모는 그리 웅장하지 않아도 우아하고 개방적이면서 포용적인 로마의 건축미가 잘 살아있는 듯 느껴졌다.

건물 전시실에는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유물들만 따로 모아 전시하고 있었다. 아래층에는 주로 고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유물이, 위층에는 고대 로마 유물이 전시돼 있었다. 이곳 소장품은 약 4만4,000여 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고 한 번에 1,200여 점씩 일정 기간 돌아가며 전시한다고 한다.


게티 빌라가 소장한 유물들만이 아니라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쓴 아름다운 고대 로마 양식의 건물과 각기 특징이 있는 네 개의 정원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다.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익숙해진 신화와 제신들을 수 천 년을 뛰어 넘어 바로 눈앞에서 만난 감격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컸다. 대리석 조각품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형미, 금은 장신구와 화폐 등 뛰어난 세공기술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어디다 비교할 수 없었다.

전시된 고대 유물들을 보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분위기속에서 몇 시간을 보내다보니 마치 그 시대를 사는 듯 느껴졌다.

폴 게티(1892~1976)는 평소 문화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쏟아 부어 고대 미술에서부터 현대 미술까지 두루 수집한 엄청난 미술 컬렉터였다. 그는 일반 박물관보다는 무엇인가 역사적인 의미를 남기고 싶어 했다. 게티 빌라의 정체성을 고대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의 유물로 정하고 그들을 전시하는 고대 유물 전용 전시관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특히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서양문화의 원천은 고대 그리스 문화이고 그 바탕에는 신화가 초석처럼 깔려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저택에서 갤러리를 열었는데 날로 늘어나는 미술품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게티 빌라를 지어 1974년에 개관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소장품 때문에 게티 빌라마저 비좁아졌다. 결국 새로운 미술관을 14년에 걸쳐 건축하게 되는데 그것이 1997년에 오픈한 게티 센터다. 고대 유물들은 게티 빌라에, 근현대 미술품들은 게티 센터에 보관하고 있다.

그는 석유사업으로 큰돈을 번 당대 최고의 부자였다. 하지만 돈에 관한한 철두철미한 구두쇠였다. 억만장자인 그가 집에 온 손님이 전화를 써 전화요금이 오르자 손님 전용 공중전화를 설치한 사건은 구두쇠계의 전설로 내려온다. 지독한 자린고비에다 악덕 기업가였고 방탕한 사생활로 가족들 간의 불화도 심했다고 한다.

지난 1973년에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괴사건이 있었다. 그의 16살 손자 존 폴 게티 3세가 로마에서 마피아에게 납치된 것이다. 유괴범이 요구한 몸값은 1,700만 달러였다. 할아버지인 폴 게티 1세는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했다. 마피아는 손자의 귀를 잘라 보냈다. 그는 손자의 잘린 귀를 본 후에야 몸값을 지불했고 5개월 만에 손자가 풀려났다. 이 희대의 유괴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얼마 전 개봉된 ‘올 더 머니’이다.

게티는 생전에 구두쇠로 비난을 받았으나 죽으면서 엄청난 돈과 미술품을 사회에 기부했다. 그 막대한 유산은 오늘의 게티 빌라와 게티 센터로 부활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어서 관의 뚜껑을 덮은 후에야 결정된다는 옛 사람들의 말이 맞나보다. 그가 거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업적에 비춰 보면 그의 생전의 오명은 그저 산들바람에 떨어지는 거목의 나무 잎 하나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배광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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