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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문의 팝송산책] 방송인 최동욱씨를 만나다(제 2 편 )

2018-06-01 (금) 정태문 라디오 DJ 및 팝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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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문의 팝송산책] 방송인 최동욱씨를 만나다(제 2 편 )
한국 음악계의 거장, 팝 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 한국 라디오 방송의 신화를 창조한 인물 등 수 많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그의 이름… 최동욱. 그는 고교 시절 부터 음악에 심취하여 하였으며, 대학 재학 시절엔 합창단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미 공보관 (USIS) 회원에 가입하여 각종 레코드를 대여 받아 들으면서 지식과 음악 정보를 얻었다. 이 때 수집한 경험과 정보는 향후 방송계에 활동 하면서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3시의 다이얼은 당시 4년간 청취율 1위를 기록할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다.

- 3시의 다이얼 프로그램을 할 때 팬들의 반응은 ?

▶종전에는 듣고 싶은 음악 곡명을 엽서에 적어 방송국으로 보내 신청하는 방법이 유일한 시절이었다. 이 경우 대개 1 주일 시간이 소요 되곤했다. 허나 전화로 신청할 경우 곧바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 예로 이 프로그램은 1967-1970년 거의 4년간 연속으로 라디오 방송 청취율 1위를 차지했다. 그후 타 방송이 유사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송했었다.


- 그 때 영화 배우 신성일 보다 인기가 있었고 이런 일화가 떠 돌았다. 배우 신성일이 명동길을 지나 간단해도 쳐다 보지 않던 사람들이 최동욱이 지나가면 다들 쳐다본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 시절 인기를 기억 하나요 ?

▶물론 기억한다. 과분한 팬들의 사랑과 예상을 훨씬 넘는 호응을 받아 지금도 그 때의 팬들에게 감사하게 생각 하고 있다.

- 한 때 영화와 방송에 소개 되었던 음악 감상실 “세시봉” 에 대해서 얘기를 ?

▶그 당시 음악 감상실에서는 78회전 SP 레코드판을 들려 주다가 1955년 전후로 LP레코드가 한국에 상륙하면서 종로 2가 인사동 입구에 “르네상스” 와 “충무로의 “세시봉” 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세시봉”은 영화 배우 김지미가 모 군장성의 부인의 자금으로 문을 열었고 나도 배우 엄앵란도 자주 드나 들었다. 그후 주인이 바뀐 후 소공동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나중에는 영업 부진으로 서린동 스타더스트 호텔 옆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 무교동의 세시봉은 한국 포크송의 발상지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

▶우선 무교동이 아니고 서린동이다. 어쿠스틱 기타 ( 세칭 통기타) 친다고 해서 포크 가수, 그가 부르는 노래를 포크송이라고 일컫는 자체가 모순이고 어불성설이다.

- 그러면 왜 당시에 1 인 가수가 많이 소개 된 이유는 ?


▶그 때는 음악 감상실이나 맥주 살롱 등의 요식업은 2 인 이상의 연주자를 무대에 세울 수 없도록 규정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업소들이 1 인 기타 가수들을 기용하여 출연하게 한 것인데 이것이 포크 가수 , 이들이 부르는 노래도 포크 송으로 와전된 것이다. 서린동의 세시봉도 1인 이상의 출연이 불가능했다. 초기에 조영남이 군복을 검정 염색한 옷차림으로 기타를 들고 노래를 했었다. 그 뒤 윤형주가 세시봉에서 헛드렛일 하던 송창식과 어울렸다. 그러다 주간한국에서 공개행사 등을 개설하였고, 급기야 대량 가수들의 무대를 시도하다가 당국에서 업태 위반으로 수 차례 경고를 받던 중 영업실적이 좋지않아 폐업한 것 이다.

- 몇 해전 MBC 가 추석특집으로 방영한 세시봉과 영화 세시봉에 대해서 전해 줄 게 있다면?

▶ MBC TV 가 방영한 프로그램은 사실과 70% 가 달랐지만 영화 세시봉의 내용은 사실과 90%가 다른 픽션임을 참고 바란다. 음악클럽에서 정기적인 무대를 두고 가수가 출연 할 수 있었던 곳은 명동장의 OB’s Cabin 뿐이었고, 그 뒤 극장이고 맥주홀이 생겨 나면서 번창했다. 다시 말해서 송창식과 윤형주가 함께 노래한다는 것은 세시봉에서는 있을 수 없는 얘기며 공연위반이었다.<계속>

<정태문 라디오 DJ 및 팝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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