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숨을 고르는 시간

2018-05-26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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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같이 튀어나왔던 ‘미북 정상회담’이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미북 정상회담을 트럼프 대통령이 24일 돌연 취소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 ‘한반도 평화’의 관문으로 정상회담에 관심이 높았던 한인들은 허탈해한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미국은 미북회담의 성공가능성이 낮다고 봤다”고 말한 것을 보면 현실적 성과에 대한 저울질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 급하게 진행되었다. 옆에서 구경하기에도 숨이 가쁠 만큼 속도가 빨랐다. 계단을 서둘러 뛰어오르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계단이 어디로 향하는지, 전체 그림을 놓칠 수가 있다. 때때로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2018년 싱가포르 회담이 있다면 1986년에는 레이캬비크 회담이 있었다. 전자는 무산된 미북 정상회담, 후자는 성사된 미소 정상회담이다. 공통점은 의제의 핵심이 ‘핵’이라는 것 그리고 수십년 적국의 수장들이 처음으로 정상회담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 그해 10월11일과 12일 아이슬란드의 수도에서 만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은 당시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날의 만남이 길을 터서 미소 양측이 군축에 합의하고 냉전종식에 이르렀다는 것이 역사적 평가이다.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몰아붙였던 레이건이 태도를 바꾸어 소련과 핵무기 감축 협상에 나서자 행정부, 의회 내 강경파들의 반발이 심했다. 이때 레이건의 옆에서 협상을 주도한 인물이 조지 슐츠 국무장관이었다. 소련과의 대화에 반대하는 여론, 강경파의 공격, 거기에 미소 양측의 깊은 불신 … 슐츠 장관의 하루하루는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97세가 되도록 정정한 슐츠 전 장관에게는 ‘비법’이 하나 있었다. 매주 한 시간을 떼어내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사무실 문을 닫고 종이와 펜만 들고 조용히 앉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에는 그의 아내와 대통령, 두 사람을 제외한 누구의 전화도 연결하지 말도록 비서에게 지시해두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그 시간에 그는 국무장관으로서 해야 할 전략적 방향들을 숙고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단절의 시간 없이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순간 순간의 이슈들에 끌려 다니느라 국익이라는 보다 큰 문제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에게 말했다. 달려가던 발길을 멈추고 돌아보는 시간, 일종의 숨 고르는 시간이었다.

2018년 시작하고 5개월, 올해는 유난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뉴스가 많았다. 새해 벽두,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측이 참가한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발표가 있은 후 남과 북은 막혔던 둑이 터진 듯 왕래가 잦아졌다. 올림픽에서 남과 북의 선수들이 만나고, 북한 고위급 인사들이 남한을 방문하고, 남한의 연예인들이 북한에서 공연을 하고 … 드디어 4월27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 사이 미북 정상회담 일정이 잡히고,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한을 2번이나 방문하고, 한미정상회담에 한중일 정상회담, 김정은-시진핑 회담 … 그리고 결국은 미북 정상회담 취소까지. 나열하기도 숨찰 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 모두가 굵직굵직한 뉴스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거기에 각자 가정에서 직장에서 화산처럼 툭툭 터지는 크고 작은 일들. 사춘기 아이가 문제를 일으켜 속을 끓이는 후배도 있고, 연로한 어머니/아버지의 치매증상이 심해져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지인도 있으며, 남편이 느닷없이 이혼을 요구해 충격에 휩싸인 친구도 있고,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친구도 있다. 사별의 슬픔, 감원이나 사업실패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등도 항상 우리 주위를 맴돈다.

삶은 희로애락을 몰고 매일 아침 우리를 찾아오고, 그렇게 삶의 손님들을 맞다보면 새해 들어 5개월 된 이때쯤 우리는 지친다. 숨을 고를 때가 된 것이다.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아무 것도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시간의 지배에서 잠시 놓여나는 가벼움을 맛볼 때가 되었다.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그러잖아도 지금은 너무 바쁜 세상이다. 50년 전 방 하나 크기였던 수퍼 컴퓨터가 각자 손안에 들어있으니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자고 나면 트윗을 날리고, 밥 먹으면서도 고객과 전화를 하고, 여행 가서도 직장 이메일을 체크한다. 끊임없이 뭔가를 하는 것에 중독이 되어서 빈 시간을 못 견뎌 한다.

때로 멈춰 서서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국가 대사도 개인사도 속도가 능사는 아니다. 숨을 고르는 시간이 있어야 전체 그림이 보인다. 슐츠의 ‘홀로 있는 시간’을 따라해 보는 것도 아이디어다. 메모리얼 데이 연휴를 기해 여름 휴가철도 시작되었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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