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고무장갑에 깃든, ‘일상의 비일상화’ 전략
2018-05-23 (수) 12:00:00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가 이끌고 있는 캘빈 클라인 205W39 NYC의 2018 봄, 여름 제품 중 분홍색 고무장갑이 있다.
주방용 고무장갑보다 폭이 좁고 길기 때문에 마치 이브닝 드레스에 착용하는 긴 가죽 장갑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합성고무 100%가 만들어 내는 특유의 색깔과 로고가 프린트 된 모습은 이 물건이 본래 고무장갑이라는 걸 분명히 알려준다.
이렇게 의외의 제품을 내놓는 건 캘빈 클라인만 하는 게 아니다. 베트멍은 비닐 비옷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셀린느에서는 로고가 찍힌 투명 비닐봉지가 나왔었다. 질 샌더에서는 로고를 찍은 슈퍼마켓 용 종이봉투를 내놓은 적도 있다. 이외에도 수도 없이 많다. 대체 왜 고무장갑 같은 게 고급 브랜드에서 나오고 있는 걸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비닐이나 라텍스는 가죽과 더불어 세컨드 스킨(제 2의 피부)라고 부르는 페티시 패션의 전통적인 아이템이다. 서브 컬처의 영역이었지만 이제는 많이 대중화되어 TV에서 볼 수 있는 아이돌 그룹의 의상에서도 페티시 패션의 요소를 자주 볼 수 있다. 캘빈 클라인의 고무장갑도 컬렉션에서 라텍스로 만든 의상에 사용했다.
하이 패션 브랜드에서는 오랫동안 자질구레한 아이템을 선물용으로 내놓고 있다. 삼각자나 장난감 요요, 메모지 보관함 같은 일상 용품을 은으로 만들거나 혹은 가죽 장인이 정교하게 만들어 내는 식이다. 사소한 제품들이 하이 패션의 선택에 의해 사소하지 않은 제품으로 바뀌고 그런 변신 자체가, 말하자면 유머로 소비된다. 오랫동안 해왔던 일이라 지금 시점에서 아주 신선하다고 보긴 어렵다. 또 다른 이유를 꼽자면 비닐과 플라스틱 등 흔하고 저렴하지만, 옷에는 이질적인 일상 소재를 활용한 제품이 최근 유행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크게 보면 스트리트 패션의 하이 패션 진입에 따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급 패션은 오랫동안 ‘예술적인 패션 디자이너와 그것을 이해하는 소비자’라는 엘리트주의에 기반해왔다. 패션은 점점 관념적이고 난해한 영역으로 나아갔고 일상 의류와 괴리도 커졌다. 그러다 보니 하이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괴상한 옷을 입고 등장해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스트리트 웨어가 하이 패션의 자리를 점유하기 시작하면서 패션은 다시 옷이라는 일상성을 회복하고 있다. 운동화와 티셔츠처럼 익숙한 제품들을 디자이너들이 “재해석”해 내놓는 것이다. 고급 브랜드의 로고와 멋진 프린트가 들어가 있지만 어쨌든 기본은 누구나 아는 물건이다. 이런 식으로 재해석하는 일상의 제품들은 옷을 넘어 비닐봉지나 고무장갑, 스케이트 보드와 야구 글러브, 휴대용 젓가락과 벽지까지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옷을 보며 대체 어떻게 입어야 하는 건지 또는 옷이 맞긴 한 건지 고민해야 했던 지난 시절 하이 패션의 난해함 같은 건 없다. 누구나 보자마자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변화를 ‘패션의 민주주의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하이 패션은 난해함과 관념성을 없앴지만 흔한 일상 용품에 붙은 높은 가격표라는 다른 비일상성을 동시에 만들어 내기 때문에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신선함을 매우 익숙한 곳에서 만들어 내는 이 극단의 조합이 독특한 매력이 될 수 있고 일상품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제조 방식이나 예술성처럼 높은 가격을 설명하던 고급 패션 고유의 특징이 이미 흐려진 상태에서 로고와 이미지만 가지고 지금의 가격과 이미지의 힘을 계속 납득시키는 건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과도기가 지나가기 전에 새로운 수단이 등장해야 한다.
물론 하이 패션은 지금까지 어떤 거대한 격동의 시절이 찾아와도 늘 극복해 내고 고급 제품이 해야 할 일과 있어야 할 자리를 만들어 왔다. 그러면서 많은 브랜드들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또 많은 디자이너들이 새로 등장한다. 이런 유연함과 적응력이 바로 패션의 힘이기도 하다. 그런 대응의 과정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또한 패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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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