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재인 길들이기

2018-05-1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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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북한 대사관 공사로 있다 2016년 망명한 태영호는 북한 최고 엘리트 출신이자 현직 관리로 한국에 넘어온 최고위직 인물이다. 김정은 정권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한국에 들어와 북한의 치부와 약점을 수시로 밝혀온 그는 북한 입장에서 볼 때는 제거 대상자 1순위다.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2017년 한 인터뷰에서 “나는 북한에 있는 내 가족과 전체 인민을 노예 상태에서 구하기 위해 북한 정권 타도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북한은 16일 0시30분 한미 공군의 ‘맥스 선더’ 연합 훈련을 비난하며 16일로 예정돼 있던 남북 고위급 회담을 무기 연기한다고 통지했다. 회담 당일 한 밤중에 일방적으로 이런 통고를 했다는 것은 북한이 남한 당국을 얼마나 깔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지난 1월에도 북한은 현송월 방남 취소 통고를 아무 이유 없이 한밤중에 했다. 그리고는 역시 아무 설명 없이 취소를 취소했다. 이 때도 한국 정부는 내려오는 것만 황송해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밟아도 꿈틀하지 않는 지렁이임을 고백한 것이다.


북한 관영 조선 중앙 통신은 “남조선에서 무분별한 북침 전쟁 소동과 대결 난동이 벌어지는 험악한 정세”를 회담 취소 이유로 들었으나 이는 한미 군사 훈련을 이해한다던 김정은의 발언과 배치되는 것이다. 지난 4.27 판문점 회담도 한미 군사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열렸다.

북한의 회담 취소 진짜 이유는 발표문 뒷부분에서 드러난다. 조선 통신은 “남조선 당국이 조선 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 위해 노력하자고 약속하고서도…천하의 인간쓰레기들까지 국회 마당에 내세워 우리의 최고 존엄과 체제를 헐뜯고 판문점 선언을 비방 중상하는 놀음도 버젓이 감행하게 방치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말한 ‘인간쓰레기’가 바로 태영호다. 태영호 전 공사는 14일 국회에서 김정은 체제 유지 임무를 맡고 있는 3층 서기실의 실체를 폭로한 ‘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책 출판 기념회를 하면서 기자 간담회를 열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불가능하며 미북 협상은 결국 핵 감축 선에서 마무리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완전 비핵화를 위해서는 무제한 강제 사찰이 필수적인데 이는 북한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북한이 수용할 수 없으며 경제도 중국이나 베트남식 개혁 개방이 아니라 주민 통제가 쉬운 개성 공단 같은 경제 특구나 금강산 같은 관광 특구를 늘리는 쪽으로 갈 것으로 내다봤다. 정확한 지적이다.

조선 통신은 이어 “선의를 베푸는 데도 정도가 있고 기회를 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며 “일정에 오른 조미(북미) 수뇌 상봉의 운명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해석하면 판문점 회담으로 문재인 지지율을 80% 넘게 올려줬는데 태영호 하나 단속을 못해 김정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느냐는 질책과 함께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나오면 북미 회담도 깨버리겠다는 협박인 셈이다.

북한의 이번 통보로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에는 비상이 걸렸다. 남북 관계 개선에 모든 것을 걸었는데 북한이 딴 마음을 먹는다면 지지율 추락은 물론 압승이 예상됐던 6.13 지방 선거 판세까지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한반도 운전사를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김정은에 끌려 다니는 정부 여당의 모습이 참으로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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