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눈물이라는 작은 창문

2018-05-12 (토) 최청원 내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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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사람은 눈물 없는 슬픔이 많고, 젊은이는 슬픔 없는 눈물이 많다고 한다. 의사는 직업상 환자 진찰 시 감정은 극히 절제하고 이성적으로 대한다. 그러나 내겐 슬픔을 억제 못하고 눈물까지 흘렸던 경우가 있다.

수년전 오지 멕시코 낚시터에 동행했던 한 친구가 브레이크에 말썽이 생긴 차를 그냥 운전하겠다고 했다.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어 말렸지만 계속 운전을 고집했다. 할 수 없어 피해를 줄이려 다른 차를 안타고 함께 탑승하여 낭떠러지 외길에서 조수의 역할을 자처한 나의 선택을 그가 마음에 새긴 듯했다.

이를 계기로 나를 진정한 형님으로 생각하며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면서 늘 보여준 그의 진실 된 행동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년 계속되었다. 나의 멕시코 의료선교 초창기에 같이 가기로 했던 사람들이 떠나기 며칠 전 동반을 취소했을 때 그곳의 환자들과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가야만 했던 경우가 세 번이나 있었는데 그때마다 동반해준 사람이 그였다. “형님 험한 길 혼자 가지 마세요”라며 매일 일해야 하는 생업을 취소하고 9시간 넘는 트럭 운전, 식사준비, 무거운 물품의 운반 등을 도맡아 주었다.


암 투병 중 “형님 내가 먼저 천국에 가면 언젠가 오실 형님을 기다리겠습니다”라며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드리던 그는 임종하는 날 자정 무렵, 자다가 불려 나온 10살짜리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쥔 채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눈을 뜬 채로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하던 나는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예전 낚시 캠핑 때와 같이 바닷가 은하수 별빛 아래 우리 모두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을 이어가는데 느닷없이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눈물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허벅지를 멍이 들도록 아프게 꼬집어 가면서 조사를 마쳤던 기억이 난다.

조사를 하다 눈물이 터진 경우는 또 있었다. 35년 전 병원치료비 내기가 어려웠던 한 환자를 무료로 치료 해준 일이 있었는데 정원사였던 그는 그 단 한 가지 이유로 35년간 한결같이 매주 내 오피스 주차장의 뜰과 우리 집 정원을 무료로 가꾸어 주었다.

폐암 발병 후에도 그는 변함없이 정원사일 뿐만 아니라 집안의 힘든 일들을 맡아 주었다. 얼마 전 내 아내가 힘든 병에 걸렸다는 말을 나한테서 전해 듣는 순간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두 눈에 눈물이 듬뿍 고인 채 “아니 아픈 내가 대신 걸려야 되는 것을 어찌…”라고 말을 다 잇지 못하면서 진심으로 가슴 아파했다.

진실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의 뺨이 자신의 뺨에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고 그 시대에 가장 완전한 사람으로 꼽혔던 체 게바라의 말처럼 난 그때 그가 나의 ‘진실한 이웃’이라고 새삼 느꼈다.

그의 장례식 조사를 하며 나는 “앞으로는 이른 아침 오피스 주차장에서 청소하는 그의 뒷모습을 창문 너머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로 마치려했다. 그런데 그 생각만으로 눈물이 솟구쳐 앞을 가리는 게 아닌가. 눈물은 흐르고, 목은 메이고…난 잠시 조사를 중단하고 단상에 놓인 물을 계속 마시며 진정할 시간을 벌었다. 조문객들은 내가 갈증이 심해 물을 마시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이 있는 영혼의 진실을 가졌을 때 진한 눈물이 되는 것 같다. 눈물은 사람이 만드는 작은 창문이라 눈물을 통해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고 한다. 눈물을 감추려고 꼬집지도 말고, 애꿎은 물만 마시지도 말고 이젠 그냥 눈물을 흘려야겠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도 깊은 슬픔을 경감시키는 길이 될 것이다 .

<최청원 내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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