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SF에 온 손열음

2018-05-11 (금) 이정훈 기자
크게 작게
[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SF에 온 손열음
인간이란 딱히 한 두 가지를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나지는 않지만 한 사람의 일생을 되돌아 볼 때, 대체로 그의 삶을 대변하는 한가지씩은 있기 마련이다. 작가라면 그 작가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 대표작. 평범한 일생을 살았다면 어려웠던 시기를 강인한 생존력으로 살아냈던 어떤 시대… 그리고 그 인내력와 정신력도 삶이라는 역사를 이어져 올 수 있게 한, 그 ‘무언가를 위하여’ 의 한 가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창 교향곡’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는 ‘비창’을 작곡한 뒤 그 작품이 너무도 아름다워 스스로 수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하면 수많은 명곡을 남긴 작곡가로 유명하였는데 왜 하필 ‘비창’이었을까? 아니 왜 ‘비창’하면 차이코프스키를 떠올릴만큼 ‘비창’은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작이 되었을까?

우선 이 음악은 어느 작곡가가 하나의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는 차원을 벗어나 매우 독특한 양식으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즉 ‘비창’ 이야말로 음악을 썼다기 보다는 어떤 삶의 본질을 음악이란 양식으로 표현한, 간절함이 담긴 작품이었다고나할까.


이 음악은 교향곡 형식으로 쓰여졌지만 1악장과 2악장이 거꾸로 되어 있다. 3악장이 마치 4악장같은 피날레가 엿보이는가 하면 마지막 4악장은 2악장 처럼 느리고 어둡다. 즉 ‘비창’ 이야말로 음악의 형식에 얽메이지 않은 차이코프스키의 감정 상태… 죽음을 앞둔 어떤 작곡가의 이별곡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곡이기도 하지만 세계의 본질… 즉 어쩌면 평생을 상실감 속에서 살아야하는 모든 인류의 모습을 솔직하게 대변하고 있는 음악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음악으로 쓴 실존주의 문학같은 작품이라고나할까.

사실 이 곡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젊은 시절에는 다소 기피하던 곡이기도하다. ‘비창’ 이 비로소 마음에 제대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만원 버스 안에서 짐짝처럼 실려가던 어느날 오후… 버스가 모 대학 정문 근처에서 정차했을 때였다. 버스 안의 라디오에서 ‘비창’ 이 흘러나왔고 늦은 오후라서 석양이 지기 시작한 대학의 정문 앞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혼란의 극을 이루고 있었다.

참으로 인간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삶이 인간을 어디론가 몰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피곤함이 극에 달했을 때 ‘비창’ 은 마치 세상과 절연된, 진공 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처럼 저홀로 울부짖고 있었다. 세상은 아름답고 모든 것이 활기에 차 있는데 자신만이 공허하고 강한 상실감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듯이…. 아니 반대로 세상이 모두 무감각하고 그 무의미한 공허함을 이어가고 있을 때, 음악이야말로 진정한 정신 세계… 대중 속의 고독으로서의 가슴 아픈… 강렬한 영혼의 본 모습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영혼이 없는 인간… 아니 고독이 없는 삶… 그러한 영혼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인간은 고독할 때… 아픔 만큼 성숙해지고 순수해지기 마련일 것이다.
인간이 음악을 사랑하고 또 음악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영혼이 깃든 음악’

SF에 온 손열음은 바로 그러한 연주인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영혼있는 음악가, 또 그것을 위해 태어난(?) 음악가로 남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지난 5월5일 SF헙스트 극장에서 열린 손열음의 연주는 최소한 그녀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답고 신선한 연주회였다.

손열음의 연주를 들을 때 마다 느끼는 바지만, 그녀의 연주는 언제나 감성에 공감을 주는 편안한 연주를 들려준다. 늘 자신감에 넘쳐있고, 열정이나 테크닉, 감성… 모든 면에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 5월5일의 연주는 무언가에 압도당하지도 않고 또 압도하려고도 하지않는… 그러면서도 흡인력있는 연주로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완벽한 테크닉이 찬사를 이끌어낸다면 소울이 있는 연주는 감동을 준다. 손열음의 연주는 열린 연주로서의, 청중과 교감하는 그런 연주회였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손열음의 손끝에서 되살아 난 라흐마니노프는 마치 영원의 순간이요… 찰라의 추억… 순간이 영원이 되는 문화의 場이기도 하였다.
베이지역 연주회가 처음이어서 가슴 설렜다는 손열음은 (인터뷰를 통해) ‘좋은 연주홀에서 좋은 연주회를 할 수 있어 기뻤다’ 며 다시 오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청중들의 반응도 좋았고, 그녀 또한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추억있는 연주회였기를 바램해 본다.

<이정훈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