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평화로 가는 길

2018-04-28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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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여니 길은 거기 있었다. 길이 없었던 게 아니라 마음이 없었다.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린 지 73년, 군사분계선으로 막힌 지 65년, 그 선은 건너갈 수 없는 선인 줄 알았다. 길이 없는 곳인 줄 알았다.

한민족 분단의 상징이자 이산가족들에게는 평생의 한이 된 높은 벽은, 실제로는 어이없게도 허술한 경계선이었다. 한 발 내딛으면 건널 수 있는 낮은 턱의 분단선이 한민족에게는 만리장성보다 강고한 벽이었다.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은 이념과 체제의 높은 벽과 실제 물리적 경계 사이의 엄청난 괴리가 주는 비현실감으로 시작되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 땅으로 건너왔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남한 땅을 밟은 것은 처음이고 남북한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것 역시 이제껏 없었던 일이다. 공동경비구역(JSA) 북측에서 200m를 걸어 5cm 높이 군사분계선 넘어서는 데 ‘어떻게 이렇게 오래 걸렸나’ 김 위원장은 감회를 말했다. 그걸 넘어서는 게 얼마나 가벼운 일인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깜짝 ‘월북’으로도 확인되었다.


남북 정상이 첫 악수를 나눈 직후였다. 문 대통령이 “나는 언제쯤 (북한에) 넘어갈 수 있겠나” 하니 김 위원장은 “그럼, 지금 넘어가 볼까요” 라며 손을 끌었다. 한발 내딛으니 그곳은 북측 땅이었다. “분단선이 높지도 않은데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다 보면 낮아지지 않겠느냐”고 김 위원장은 덧붙였다.

본래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던 루쉰의 말이 떠오른다. 루쉰의 작품 ‘고향’에서 주인공은 오랜 세월 후 고향을 찾고는 언덕에 올라 ‘희망’을 떠올린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라는 대하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시작은 순조롭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정상회담 이후 11년 동안 얼어붙었던 남북의 길이 다시 열렸다. 당시 남북의 두 정상은 나란히 고인이 되고, 각각 그 후계자와 아들이 다시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생존의 길을 뚫기 위해 화해의 길 찾기에 나섰다.

환영만찬 메뉴부터 1953년생 소나무 식수, 그 위에 뿌려진 한라산 흙과 백두산 흙, 한강 물과 대동강 물 등 지나치게 작위적인 부분들이 있기는 했지만, 문 대통령은 진지했고 김 위원장은 소탈했다. 정상회담은 성공이었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라는 결실이 만들어졌다.

한편의 멋진 ‘평화 드라마’에 이편에서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저 편에서는 ‘김정은의 속임수에 놀아난 쇼’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게 한반도의 봄은 찾아왔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인간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길을 내려는 시도이다. 먹고 살 길을 열기 위해 일을 하고, 더 잘 살기 위해 출세의 길을 간다. 학문의 길을 가고 예술의 길을 가며 사랑을 이루기 위해 ‘그대’마음에 닿는 길을 서성인다. 길은 이 현실에서 저 목표를 나아가는 통로, 길을 나설 때는 이유가 있다. 때로는 절박함이다.

김정은 체제는 지금 한계에 봉착했다. 핵보유국으로 전략적 지위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가 크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제재로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 스위스 유학으로 세계의 다른 나라 국민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았던 그는 집권하면서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핵개발과 경제건설이다. “인민들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며 핵과 경제 병진노선을 공식화했는데, 경제가 마비되었다. 국제적 고립으로 섬 안에 갇힌 형국이 된 북한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전쟁의 먹구름 짙던 한반도의 날씨가 맑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전에도 와보았다. 2000년, 2007년 두 번의 정상회담 때에도 도달했던 베이스캠프이다. 여기서 길을 떠나 항구적 평화라는 정상에 도달하는 과제가 앞에 놓여있다.

이제까지 가보지 못한 길, 새 길을 개척해야 한다. 첫 목표는 한달 후 북미 정상회담이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 플랜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단기간 내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요구하는 미국의 입장과 북한의 단계적 핵폐기 입장을 좁히는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한반도가 평화의 길로 들어선 것을 환영한다. 민족의 먼 장래를 내다보면 평화만이 살 길이다. 그 길에 어떤 현실적 장벽들이 놓여있을 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가야할 길이라면 가야할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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