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의 용기

2018-04-20 (금)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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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용기

김희봉 수필가 Enviro엔지니어링 대표

1880년 초 여름, 뉴멕시코의 어느 작은 마을에 해가 솟았다. 교회 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젊은 보안관 윌과 청초한 신부 에미의 결혼식이다. 그 동안 윌은 범죄의 소굴이었던 이 마을을 목숨 걸고 지켜냈다. 결혼 후, 윌은 보안관을 사임하고 타지로 옮겨가게 된다. 주민들은 아쉽게 그를 떠나보내며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막 떠나려는데 역무원이 뛰어온다. 5년 전 살인죄로 구속되었던 악당 두목이 사면을 받아 낮 12시 기차로 마을로 돌아온다는 급전이다. 보안관 윌에게 복수하려 함이다. 벽시계는 10시35분.

주민들이 술렁인다. 옛 악당 부하 셋이 두목을 기다리며 결투 준비를 서두른다. 하객들은 윌과 신부를 억지로 마차에 태워 보낸다. 그러나 윌은 중도에 마을로 돌아온다. 새 보안관이 없는 상황에서 도망칠 수 없다며 아내를 설득한다. 10시50분.


아내는 가장의 책임이 더 중하다고 윌에게 매달린다. 윌은 전직 보안관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들도 떠나라고 권한다. 주민들의 도움을 청해보지만 그들 역시 피해를 당할까봐 몸을 사린다. 11시20분.

윌은 참담한 심정으로 교회 문을 두드린다. 교인들은 예배 중에 말라기를 읽고 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교만한 자와 악한 자는 다 초개 같이 망할지니...” 의협심 강한 몇 교인들이 자원하려는 데 한 집사가 제동을 건다. “지금 윌은 법적으로 보안관이 아니요. 이 문제는 윌과 악당 간의 사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주민들이 나설 일이 아니오.”
한 여신도가 반박한다. “마을을 지키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은행 재력가가 일어나 차갑게 쐐기를 박는다. “이곳에서 또 피를 흘리면 이 마을 개발은 끝장이요.” 대세가 기울자 목사마저 고개를 젖는다. “교인들에게 살인하라고 권할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10분 전 12시.

윌은 쓸쓸히 교회 문을 나선다. 4명의 악당과 홀로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정각 12시. 기차가 역내로 들어온다. 잠시 후, 적막을 깨고 총성이 울린다. 윌의 총에 악당 둘이 거꾸러진다. 남은 악당 하나가 윌을 조준하는 순간, 아내 에미는 반사적으로 장총을 발사한다. 이제 혼자 남은 두목은 에미를 인질로 잡아 윌에게 권총을 버릴 것을 명한다. 그 순간 에미가 몸을 돌려 두목의 얼굴을 할퀸다. 윌의 총이 불을 뿜는다.

옛 영화 “하이 눈(High Noon)”의 줄거리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던 진정한 용기의 스토리다. 정의로운 미국을 세우기 위해 목숨 걸고 악과 맞서는 영웅의 이야기. 이것이 미국의 정신이요, 뿌리라고 믿어왔다.

영화 속 옛 서부시대의 사회 현상이 현대와 별로 다름이 없어 보인다. 돈과 권력을 쥐려 불법으로 약자들을 수탈하는 악당 무리들, 선량하나 무력하기 짝이 없는 주민들, 사욕을 채우는 데만 급급한 정치꾼들과 불의 앞에 몸을 사리고 우유부단한 법집행관들, 신앙과 행동이 상반되는 교인들, 대중들의 눈치만 보고 양심을 저버리는 위선적인 정치, 종교지도자들의 유형이 지금도 산재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보안관 윌과 같이 정의롭고 용기 있는 영웅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악의 세력이 상승하고 있다. 정적을 패배시키려고 적국과 내통하고, 돈과 권력을 쟁취하려 모략하고, 불법을 은폐하려 매수하고, 인종차별을 부추겨 분열시키고,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이 미국의 최고 보안관이 된 암울한 시대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보안관 윌을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악을 무찌르는 영웅의 등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직도 눈부신 한 낮, “하이 눈” 결투의 신화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진정한 용기의 부활을 믿는다.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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