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추한 싸움

2018-04-1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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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코미는 최근까지 워싱턴에서 가장 신뢰받는 공직자의 하나였다. 아들 부시 행정부 때 연방 맨해튼 남부지검장을 지낸 그는 법무부 부장관을 역임하고 한 때 공직을 떠났지만 2013년 오바마 대통령은 그를 다시 불러 연방 수사국(FBI) 국장으로 앉혔다.

법무부 부장관으로 있을 때는 부시 행정부 정책인 물 고문과 테러리스트 색출을 위한 법원 영장 없는 민간인 도청에 반대했으며 민간인 사찰의 경우 사표를 내겠다고 맞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이런 정치적 중립성을 높이 사 오바마가 2013년 그를 FBI 국장으로 지명하자 연방 상원은 93대 1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그를 인준했다. 그에 대한 정치권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2016년 대선을 앞두고 힐러리 클린턴 이메일 스캔들을 수사하면서 그의 명성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수사 방향에 따라 대선 판도가 바뀌게 됐으니 어느 쪽으로 가도 욕을 먹는 것은 불가피했다. 2016년 7월 그가 힐러리의 행위가 “지극히 부주의 했으나” 기소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며 연방 법무부에 힐러리 기소 포기를 권고하자 정치권 반응은 확연히 갈렸다. 민주당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공화당은 편파적 판정이라며 펄펄 뛰었다. 현직 FBI 국장이 기소 여부에 관해 공식적인 의견을 밝힌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더욱 더 구설에 올랐다.


그러다 대선을 불과 2주 앞둔 10월 26일 추가 증거가 발견됐다며 힐러리에 대한 수사를 재개한다고 밝히자 정치권은 다시 뜨겁게 반응했다. 그 때까지 그를 맹비난 하던 도널드 트럼프는 “FBI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며 코미가 한 일은 “배짱이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일로 코미는 “명예를 되찾았고 그가 한 일은 옳은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민주당은 코미가 대선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코미는 선거 전 다시 힐러리를 기소할 이유가 없다는 편지를 연방 의회에 보냈으나 이미 힐러리의 이미지는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많은 민주당원들은 아직도 이 때 코미의 발표로 힐러리는 다 이겼던 선거를 진 것으로 믿고 있다.

코미 덕을 본 트럼프는 한 동안 코미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당선 후 “나는 코미와 FBI를 매우 존경한다”고 말했고 취임 후에도 “그가 나보다 더 유명해졌다”며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두 사람 관계는 2017년 2월 트럼프가 자신의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이었던 마이클 플린에 대한 수사를 끝내라는 지시를 코미가 거부하면서 나빠지다가 그 해 5월 급기야 트럼프는 그를 해임하고 만다.

그후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코미는 최근 ABC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여성들을 고깃덩어리인 것처럼 말하고 취급한다. 대통령이 되기에는 도적적으로 부적합하다”며 “트럼프는 부정직하고 이기적인 깡패 두목”이고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다. 전직 FBI 국장이 현직 대통령을 이렇게 강한 어조로 비난한 것은 미 역사상 없었던 일이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코미는 “거짓말쟁이 더러운 공”(slime ball)이며 “마땅히 기소돼야 할 인물”이라고 맞섰다.

트럼프의 트위터 욕설은 새삼스런 일도 아니지만 전직 FBI 국장이 자기 자서전 출판을 앞두고 현직 대통령을 적나라하게 비난한 것도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트럼프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다 명예를 더럽히지 않은 채 살기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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