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떠나가는 사람들

2018-04-14 (토) 김옥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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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랍정리를 하면서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 15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 형제들과 배우자 6명이 제주도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우리들은 모두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지난 몇 년 동안 4명이 유명을 달리한 사실을 깨닫고 새삼 허무함이 가슴을 쳤다. 사실 지난 부활절 아침에 나는 큰 언니로부터 작은 언니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들었다. 이상하게 크게 놀라지도 않았고 별로 슬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동안 작은 언니는 오래 병치레를 했으며 이제까지 88년을 살았다는 사실이 놀라운 기적으로 여겨졌다. 사실 언니는 18살인가에 병을 얻어 죽을 고비를 수차례 겪었다. 처음엔 폐병으로 시작해서 연주창과 나중에는 뇌막염까지 걸려 어머니는 몇 번이나 수의까지 지어놓고 몇몇 해를 마음 졸이며 사셨다.


작은 언니가 처음에 병을 얻은 것은 이복오빠가 자신의 집에서 동맥을 잘라 자살한 것을 최초로 발견했을 때부터였다. 당시 이복오빠는 일본 여자였던 올케가 종전 후 아이 둘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을 때부터 우울증으로 몇 번 자살을 시도했을 때였다.

오빠는 우리 과수원 창고에서 목 맨 것을 머슴들이 발견해서 그 자살은 미수로 그쳤지만 그 후 엄마는 오빠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열사람이 도둑 하나 지키지 못한다는 옛말처럼 결국 오빠는 동맥을 끊어 자살을 했고, 그것을 발견했던 작은 언니는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사람들이 발견해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때부터 작은 언니의 병이 생겼다고 식구들은 믿고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큰 오빠의 귀신이 붙었다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어쨌든 작은 언니는 그 무렵부터 시름시름 병이 나서 몇 년을 앓았다. 그 당시는 6.25 전쟁 중이라 쌀이 귀해 작은 언니만 흰쌀밥을 먹이고 우리 식구 모두 꽁보리밥을 먹을 때여서 철이 없던 나는 언니가 부러워 나도 좀 아팠으면 흰 쌀밥을 먹을 텐데 했던 적도 있다.

작은 언니는 장장 7년을 앓다가 어느 날 기적적으로 일어났다. 처음엔 잘 걷지도 못하고 비실비실했다. 나는 지금도 과수원 배 밭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을 작은 언니의 손을 잡고 비틀비틀 함께 올라가던 그 봄날을 잊지 않고 있다. 언니가 스물 댓살, 나는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는 미국으로 오게 되고, 그동안 가끔 작은 언니의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정작 언니를 다시 만난 것은 십 수년이 지난 뒤였다. 처음 재회를 했을 때 작은 언니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수술이 잘못되었다고 언니는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작은 언니와 내가 다시 가까워진 것은 내가 한국에 나가 3년을 살 때였다. 늘 한 달에 한 번꼴로 작은 언니 부부와 오빠 부부는 그때 청주에서 살고 있던 나와 남편을 찾아왔다. 그들은 마치 소풍가는 기분으로 우리를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갔던 것 같다.

나는 그들이 오면 그들이 좋아하는 고기와 미국식 요리까지 곁들여 그야말로 진수성찬을 대접했다. 밤이면 노래방에 가서 목청껏 노래도 하며 즐거워했다. 그들이 돌아갈 때는 두둑한 용돈까지 챙겨 드렸다.

내가 한국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다시 떠나는 날, 작은 언니도 울고 올케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무뚝뚝한 오빠도 눈물이 나는지 계속 눈만 껌뻑였다. 그것이 그들과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이젠 제일 맏이인 큰 언니와 막내인 나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가슴 속에서 싸아! 하고 회오리 바람이 지나간다. ‘먼저 떠나고 나중 떠나지만 결국은 우리 모두 떠나가겠지. 이게 인생인가 봐!’ 혼자 중얼거리며 문득 쳐다본 하늘이 유달리 새파랗다.

<김옥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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