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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의장, 집으로 가는 길

2018-04-14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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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로 정치해설가로 저술가로 활발하게 활동해온 로버트 라이시(72) 교수가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으로 일할 때였다. 그의 나이 50 전후, 그는 장관직 일에 너무도 빠져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사무실 나갈 생각에 설레고, 저녁이면 마지못해 퇴근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오랜 친구였던 빌 클린턴과 함께 새 정부, 새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사명감과 열정에 그는 일을 해도 해도 더 하고 싶었다. 집에 와서도 일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3년쯤 계속되던 어느 날 출근을 하면서, 늘 하듯이 막내의 방에 들어가 아침 인사를 했다. 너무 시간이 일러 잠이 덜 깬 아이는 “퇴근하면 나를 깨워 달라”고 부탁했다. “네가 이미 잠든 후일 테니 내일 아침에 보자”고 했지만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이유를 물으니 아이의 대답은 “그냥 아빠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갑자기 장관직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1996년 연말이었다. 클린턴이 재선에 성공하고,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되기 직전 그는 사임을 발표했다. 갓 10대로 들어선 두 아들과 좀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는 것이 이유였다.

‘직장과 가정’ 혹은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문제가 남성 특히 고위직 남성에 의해 제기된 초기 케이스였다. 당시 그의 결정은 사회적으로 낯설었다. 모두가 박수를 친 것은 아니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고 중책에서 물러나다니 …” 라는 비난, “일을 그만두면 당장 집세도 못 내고 끼니도 못 잇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라는 분노의 반응들이 있었다. 저서 ‘부유한 노예(The Future of Sucess)’에서 그가 밝힌 내용이다.

20년 쯤 지난 지금, 비슷한 연배의 인사가 비슷한 선택을 했다. 미국에서 대통령, 부통령 다음으로 권력서열 3위인 연방하원의장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11일 폴 라이언(48) 의장이 이번 중간선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발표한 후 워싱턴 정가는 며칠 째 술렁이고 있다. 하원에서 공화당의원 40여명이 불출마 의사를 밝힌 데 이어 수장인 의장까지 사퇴 발표를 하자 “하원의 공화당 다수 입지는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이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정치인이나 고위직 인사들이 ‘가족 카드’를 쓰며 물러날 때는 대개 뭔가 밝히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는 법. 라이언을 둘러싸고도 여러 추측들이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과 일하며 겪었을 고충을 생각하면 그의 퇴진은 이미 예상되었던 것이라는 설이 가장 힘을 받는다.

공화당의 반듯한 모범생인 라이언은 트럼프와 여러모로 맞지가 않다. 2016년 경선 당시 라이언은 트럼프를 대놓고 혐오했었다.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되면서 그는 최대한 예의를 갖췄지만, 목에서 나오지 못하고 걸린 말들은 상당할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의 사퇴 결정을 정치적 테두리 안에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일과 가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추세는 남성들 사이에서 상당히 정착되었다. 1990년대 라이시의 ‘가족 선택’ 이후 지난 20년의 세월이 그냥 흐른 것이 아니다. 일에 대한 성취욕에 가족은 뒷전인 삶은 더 이상 성공한 삶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었다.

퓨 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미국 아빠들의 63%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다고 아쉬워하고 있고, 업무 책임이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빼앗는다고 느끼는 아빠가 62%이다. 직업적 성공과 부모로서의 성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은 것은 이제 여성들만이 아니다.

라이언은 2000년 결혼 후 가족들과 함께 살지 못했다. 주중에는 워싱턴에서 일하고 주말에만 위스콘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계속해왔다. 아이들을 넓은 뒤뜰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자라게 하겠다는 생각에 부부는 워싱턴으로 이사하지 않았다. 그 사이 아이들은 16살, 15살, 13살로 자라고 그는 ‘주말 아빠’였다.

그가 이번에 출마해 또 다시 의원직을 이어가면 “아이들은 나를 영영 주말 아빠로만 알고 말 것이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내 인생의 우선순위를 새로 정하기로 했다.”고 그는 사퇴 이유를 밝혔다. 아이들의 주중 행사에 매번 빠질 수밖에 없었던 그는 “아빠, 집에 올 거예요?”라는 질문이 가장 가슴 아픈 말이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퇴근하면 깨워달라던 라이시의 아들, 아빠가 집에 올지가 최대 관심사인 라이언의 아이들의 이야기가 많은 한인가정의 일이기도 하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성취하고 싶은 욕심에 아이들의 작은 바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아빠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아이들이 자라 멀리 가버린 후인 경우가 많다.

라이언 의장이 ‘가족’ ‘자녀들’에 삶의 무게중심을 두는 모습을 눈여겨보았으면 한다. 일은 항상 거기 있지만, 자녀들은 떠난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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