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실패, 그 쓰디쓴 보약

2018-04-07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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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전후 유럽에 미니 빙하기가 닥쳤다. 발트 해가 얼어붙고 유럽 전역의 강들이 얼어붙었다. 겨울은 혹독하게 춥고 길었고, 여름은 서늘하고 짧았다. 식물의 성장기간이 대폭 줄어들면서 흉작과 기근이 이어졌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자연의 가혹함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는 빙하기가 반짝 찬사를 받을 때가 있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비밀을 말할 때이다. 이탈리아의 악기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가 살던 때가 미니 빙하기였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최고의 명기로 꼽히면서, 그 정교하고 풍성한 음색의 비밀은 여전히 연구대상이다. 여러 이론 중 하나가 ‘혹독한 자연환경’이다. 악기재목인 가문비나무가 혹한 속에 살아남느라 성장을 극도로 늦추면서 나이테가 촘촘하고 밀도가 균일한 최고의 재질이 되었다는 것이다. 가혹한 조건의 산물이다.


겉으로는 모두 평온해 보여도 한 꺼풀 벗기면 걱정근심 없는 집이 없다고 한다. 진학할 대학이 결정되고, 취직할 직장이 결정되는 요즘은 특히 한숨 그득한 가정이 많다. 아들/딸이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일류직장에 취직했다고 … 한턱내고 축하하는 떠들썩한 모임 한편에는 속이 타들어가는 누군가가 있다.

대학입학 경쟁률이 사상 최고로 높아지면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 12학년생들이 부지기수이다. 합격된 대학에 결국은 진학하겠지만, 꼭 가고 싶던 대학 혹은 다른 친구들은 합격한 대학에서 거부당한 아픔은 깊고 큰 상처로 남는다. 17~18살 평생에 가장 큰 실패로 가슴에 박힐 것이다.

다음 달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의 취업고민도 깊어만 간다. 면접에 면접을 거듭하며 합격될 듯 될 듯하다 최종탈락하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면 “세상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20대 초반, 인생의 봄에 이제껏 모르던 혹한의 현실로 내쳐지는 고통을 맛보고 있다. 실패의 쓰라림이다. 그런 자녀들 옆에서 부모들은 속 시원하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애만 태운다.

실패 앞에서 우리는 공통점이 있다. 어느 누구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것,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경험한다는 것이다. 대학 불합격부터 승진 탈락, 사업 실패, 실연, 이혼 등 인생 곳곳에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실패의 지뢰들이 묻혀있다. 그런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도 하고 그대로 무너지기도 한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를 이겨낸 사람들, 실패로 맷집을 키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웬만한 실패쯤은 두렵지 않을 정도로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 큰 성공이 가능하다.
대표적 온라인 매체 허핑턴 포스트의 발행인인 아리아나 허핑턴도 그중 한사람이다.
지금은 ‘허핑턴’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 역시 무명시절에는 책 한권 내기 위해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36번 거절을 당했다. ‘해리 포터’ 작가 J.K. 롤링이 12군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리 포터’가 대성공을 거두자 문제의 12 출판사들은 스스로의 안목 없음을 땅을 치고 후회했다.

영국의 데카 음반사 역시 비슷한 실수/후회를 했다. 음반을 내고 싶다고 찾아온 비틀즈를 문전박대한 것이다. 비틀즈도 실패의 쓰라림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말이다. 안락한 성공의 상징으로 보이는 빌 게이츠 역시 실패의 경험은 있다. 트래픽 관련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트래프-오-데이터라는 회사를 만들었다가 완전히 망했다. 그때의 실패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회들을 모색하다가 몇 년 후 만든 것이 마이크로 소프트이다.

실패는 인생에 대해 가졌던 장밋빛 환상이 깨어지는 경험이다. 깨어졌으니 다시 만들어야 하고, 다시 만들려니 도전하고 개척할 수밖에 없다. 고통과 좌절의 엄동설한에서 죽을 수는 없으니 살아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엄혹한 조건이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만들었듯 위대한 성공 뒤에는 위대한 실패가 있다. 실패를 밥 먹듯 한 토마스 에디슨에게 실패는 또 다른 경험일 뿐이었다.

“나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맞지 않는 방식 1만개를 찾아냈을 뿐”이라고 그는 말했었다.

실패는 아프지만 실패 없이 풍성한 경험은 없다. 실패 없는 삶은 순탄하지만 삶의 폭이 너무 좁아진다. 너무 쉽게 안주하게 된다. 안전한 길을 그대로 따라갈 뿐 새로운 길로 도전할 필요도 용기도 갖지 못한다.

젊은이들은 실패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기 바란다. 부모들은 젊은 날 자녀의 실패에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말자. 실패는 삶의 지평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인생의 보약이다. 중요한 것은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회복 탄력성. 기꺼이 그 쓴잔을 마시자.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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