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향의 봄

2018-04-07 (토) 김완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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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대천 바닷가에서 태어나 초.중학교를 마치고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를 갔다. 그리고 대학 때 처음으로 대처로 나갔다. 어려서 약골로 병치레를 많이 해 초중고 학창 시절 결석을 많이 했다.

몸이 약해 학교를 자주 못 갔던 초등학교 시절,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학교 가고 어른들도 다 들에 나가면 그렇잖아도 한적한 시골 마을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조용했다. 투명한 햇살만 대빗자국 선명한 울안 마당 가득 쏟아져도 세상이 멈춘 듯한 정적은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았다. 난 아무 생각 없이 마루에 혼자 앉아, 적막의 그 아득함과 막막함과 혼자 대면해야 했다. 그 어린 나이에.

고향 뒷산은 높은 편이었고, 바다가 보였다. 동네 아이들과 뒷동산에 올라 놀다 보면 어느새 저녁때가 되고 하늘보다 먼저 붉게 물든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붉은 물감을 엎은 듯한 바다 속으로 둥글고 커다란 해가 서서히 사라질 때, 난 어떤 끝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현기증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알 수 없는 저녁노을의 붉은 기운은 아이들이 다 돌아간 후에도 날 그 자리에 그냥 앉혀 놓았다. 결국은 엄마나 큰 누나가 오셔서 날 업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특히 엄마 등에 업혀 갈 때가 제일 편했다. 가쁜 호흡을 하는 엄마의 가슴이 반복적으로 오므렸다 폈다를 거듭하면서 내 온몸에 전달되는 숨결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고향의 뒷산은 진달래꽃이 유난히 많았다. 봄이면 악동들과 섞여 진달래꽃을 따먹으러 산을 오르곤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진달래를 꺾으러 산에 가려면 용천배기(문둥이)가 병을 낫기 위해 어린 아이만을 잡아 간을 내어 먹는다고 했다. 아마 아이들끼리만 산에 가는 게 위험하니까 못 가게 할 요량으로 했던 말 같다. 우리는 무서웠지만 그래도 진달래 만발한 산으로 갔다.

어머니는 해마다 진달래가 만발하면 누나들과 함께 진달래를 따다 술을 담곤 했다. 연붉은빛이 말갛게 감도는 진달래술은 꽃만큼 아름다운 색을 띠었다. 어린 내가 먹고 싶다고 떼를 써서 결국 그 술 먹고 해롱거리다 꿈나라로 나가 떨어졌던 적이 있을 정도다.
그 빛깔은 사람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이 술은 진달래꽃색이 소쩍새 입속 색깔과 닮아서 두견주라고도 한다.

산 중턱에는 부락 신을 모시는 당집이 진달래꽃구름 위에 떠있었다. 돌로 쌓아 만들어진 당집은 왠지 모를 신령스러움에 악동들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벌벌 떨며 당집 안을 들여다보면 어두컴컴했고 희미하게 커다란 나무 상자가 보였다. 진짜인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그 안에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친필이 모셔졌다고 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오기 전 동네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 주는 동신(洞神)에게 한해의 무병과 풍년을 감사해하는 당제를 지냈다. 당주인 무녀 곡천네는 당샘에서 목욕재계하고 제를 주관하였으며 농악에 맞추어 춤도 추고 주문을 외면서 내년에도 무병과 풍년을 기원했다. 그녀는 고대국가로 치면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했던 제사장이나 주술사와 같았으리라.

하여튼 돼지, 닭 등 가축을 잡고 술과 떡, 과일,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보름달이 환한 당집 앞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 모두는 밤늦도록 축제를 즐겼다. 돌이켜보면 시골마을을 지배하던 완고한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이것은 어쩌면 디오니소스 축제라 할만 했고, 미약하나마 신화적 요소가 남아있던 때였던 같다.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1960년대 후반 나의 고향 풍경이다.

나는 농경문화의 끝자락을 체험한 세대리라. 이것은 내가 감성적으로 좀 더 풍요로울 수 있는 자산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되고 도시화되면서 지금은 시골도 이런 풍습이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다.

<김완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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