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01)제34대 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③

2018-03-30 (금) 조태환/LI 거주
크게 작게
Dulles 는 장차 대만의 장개석이 본토를 회복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미국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서 철수할것도 고려해 볼것이라고 호언하였었다. 시간이 조금지나자 Dulles 도 자신의 호언들이시행되기는 어려운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꼭 한국처럼 중국에 연결되어 있는 더 큰 반도인 Indochina 에서 한국의 경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종기가 한국전쟁보다 먼저 곪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월남에서 호지명이 이끄는 공산군들이 일본군을 쫓아내고 월남 민주주의 공화국을 건국하였다. 식민 종주국이었던 불란서도 호지명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으며 호지명은 불란서군 1만5천명이 월남에 주둔하는것에 동의하였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른 많은 식민종주국들이 WW II 종전후에 그랬던것 처럼 불란서도 월남식민지를 유지하고 싶어졌었다. 불란서의 공산당원들까지 식민지 유지에 동의하였었다. 불란서는 호지명을 몰아내고 자기들의 괴뢰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여 전쟁이 일어 났고 1947년에 호지명과 월맹군들은 숲속으로 도망 할수밖에 없었었다.

그러나 월남의 사태는 불란서나 미국이 원하였던대로 진전되지않고 있었다. 불란서군은 호지명에게 점점 몰리고 있었다. 한편 중국이 모택동의 승리로 공산화가 된것을 경험했었던 까닭에 미국은 월남의 전쟁을 식민통치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월남민족의 해방투쟁으로 보지않고 마침 한국전쟁에도 참전중이었던 때 이었던지라 불란서가 Indochina 의 공산화를 막아주는 전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은 월남이 Indochina 지역으로의 공산화 확산을 막아줄 중요한 방어벽으로 생각하였다. 어느 의미 에서는 미국이 해야할 전쟁을 불란서가 대신해주고 있다고도 생각되어 미국은 1950년부터 불란서에 자금과 무기로 원조하기 시작하였다. 1953년에 이르러서는 원조액이 6천만불에 이르렀으며 1954년에는전쟁비용의 80% 를 미국이 부담하고 있었었다.


1953년에 한국전쟁이 종전되어가자 중공은 호지명에게 더 많은 원조를 해주었다. 호지명군은 Dien Bi/en Phu를 포위하고 불란서군을 섬멸해가고 있었다. 미국정부의 일각에서는 미국이 Dien Bien Phu주변을 폭격함으로써 불란서를 도와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었다. 그러나 Eisenhower 는 미국이 식민지 제도를 부활하려고 참전한다는 오해를 받지않기 위해서는 미국단독으로 참전하여서는 않된다고 주장하였다. 영국은 전쟁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음으로 잠전하지 않겠다고 하였었다. 미국 국회의 지도자들도 전쟁확산의 위험성 때문에 참전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여서 미국의 병력이 월남전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았었다.

“다행히” 1954년 4월에 Geneva 에서 Indochina 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미국, 쏘련, 영국, 불란서, 중국등이 월남, 캄보디아, 라오스 의 대표들이 배석한 가운데 회담을 가진 끝에 우선 월남을 공산주의 지역인 북반부와 자유민주주의 지역인 남반부로 양분하기로 하되 1956년에 국민투표로 국운을 결정하기로 합의 하였었다. 불란서는 마지막의 월남왕조 으 바오 다이 황제를 월남의 친불 괴뢰황제로 등극시켜서 월남을 계속 식민지로 유지해 보고자 했었다. 그후 전개된 월남전쟁에 대해서는 앞으로 조금 더 상세하게 다루워 보고자 한다.

월남사태의 진전을 보고 놀란 미국은 쏘련의 국제공산화 흉모에 대처할 전략이 필요 하다고 생각하였다. Dulles 국무장관의 발상으로 많은 나라들을 공산주의로 부터 방위하기 위하여 유럽의 NATO 같은 방위기구를 설립할 목적으로 쏘련, 중공등의 공산국가들을 제외한 많은 국가들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Pacto Mania” 에 빠져들었다. 1954년 9월에 태평양 지역의 방위를 위해 미국은 영국, Australia, 불란서, New Zealand, 파키스탄, 비율빈, 태국등이 참가한 SEATO (South East Asia Treaty Organization) 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에 비공산국가들이었던 캄보디아, 라오스, 월남등도 방위해 주기로 하였었다. 1953년 10월에는 한국과, 1954년 12월에는 대만과도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1955년에는 영국, 터키, 이락, 이란, 파키스탄등이 참가한 Bagdad Pact 가 조인되어 METO (Middle East Treaty Organization) 가 설립되었고 그 지역에서 영국의 석유이권을 보호하고 쏘련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쏘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미국은 Bagdad Pact 에 참여 하지는 않았었지만 쏘련은 중동지역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었다고 한다.

아마 쏘련의 비위를 몹시 거슬린것이 1954년 10월에 맺어진 Paris Pact 이었을 것이다. 이 조약으로 서방 열국들은 쏘련이 지배하지 않던 독일의 지역들을 통합한 Federal Republic of Germany (서독) 의 주권을 인정하고 서독이 50만명의 군대를 창군하고 NATO 에 가입하도록 허락하였다. 미국과 영국은 서유럽의 나라들이 원하는한 대규모의 병력을 유럽에 주둔시키기로 약속도 하였었다.

미국은 CIA 의 물밑 활동으로 여러나라들의 정치에 개입하고 정부전복도 하였었다고 한다. 1952년에 Egypt 의 Gemal Abdul Nasser 가 친영 폭군으로 부패했던 Farouk 왕을 퇴위시키고 공화국을 만든 쿠테타에 CIA 가 협조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1953년에는 Iran “공화국”의 Mossadegh 수상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친서방이었던 Shah 를 복위시켰었다. Mossadegh 는 영국소유의 석유이권을 국유화하려 하였었는데 미국의 덕택으로 복위된 Shah 는 미국에게 많은 석유이권을 주었고 미국은 이때부터 Iran 국민들의 증오의 대상국이 되었었다. CIA 는 1954년에는 야권정치인들을 후원하여 친공성향을 보인 Guatemala 의 정권이 전복되도록 하였었다고 한다.

수백만명의 “정적”들을 살해하고 수만명의 “정치범”들을 Siberia 의 강제노동 수용소에 보내면서 영세집권을 할것같았던 무자비한 폭군 Stalin 도 결국 1953년에 사망하고 만다. 그가 쏘련과 세계의 전인류에게 저질른 역사적인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쩌면 지금까지 폭군정치 아래 농업후진국으로 계속되었을수도 있었던 Russia 를 미국에 맞서는 강대국 으로 만든 사람이다.

필자는 Pyramid 같은 경이적인 역사유물을 남겼기 때문에 애급의 왕들이 위대한 통치자들이 었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구쏘련을 서방에 개방하여 결국은 Stalin 식의 쏘련이 폐멸되도록하여 서방에서 인기가 높아서 “미국대통령에 출마하면 당선될 것이다” 라는 농담을 듯던 Gorbachev 가 막상 자유스러워진 쏘련에서는 “국가반역자” 쯤으로 여겨지고 있던것을 보았었다. 필자는 1991년에 쏘련을 관광하였는데 Putin 이 신임대통령이 되어서 구쏘련식의 군대사열을 하는것을 TV 에서 보았고 Kremlin 광장에는 쏘련적기를 들고나와 구쏘련시대를 그리워 하며 시위하는 사람들을 보고 놀랬었다. Putin 의 집권연속은 Russia 가 구쏘련의 Stalin 시대로 후퇴하게 만들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쏘련 비밀경찰 출신인 Putin 이 2016년의 미국대통령선거를 교란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각종의 sabotage 활동을 미국에서 분명히 해왔을 것이다.

Stalin 의 사망으로 다소 안정을 잃었던 Kremlin 에 Nikita Khrushchev 와 그의 일당이 새집권세력으로 등장한다. Khrushchev 는 UN 총회에 참석하여 어떤 의제에 쏘련의 불만을 강조하기 위하여 쏘련대표단 전원이 구두를 벗어서 책상을 두드리는 식의 천박한 행동도 서슴치 않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서민적”인 성품때문에 쏘련내에서 인기가 있었으며 국제정치에 교활했었으나 정세에 따라 타협도 했던 사람이었던듯 하다.

<조태환/LI 거주>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