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ke 의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조금 과장해서 지어낸 농담이 있다. 그가 NATO사령관으로 있을때에 어느날 NATO 본부 정문계단을 내려오고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등병이 “장교님, 담배불좀 빌려주세요” 라면서 그를 불러 세웠다. lighter 를 꺼내서 담배불을 붙혀준후 Ike 는 “자네 소위나 중위 한테는 담배불 부탁을 하지 않도록하게” 라고 충고해 주었었다고 한다.
Ike 는 Texas 에서 태어나 그가 두살때 Kansas 로 이주했던 별로 여유가 없던 집안에서 일곱형제중의 하나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West Point 를 1915년에 졸업하였다. MacArthur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을 할때와 주 비율빈 미군사령관을 했을때에 그의 밑에서 Ike 는 령관장교로 일했었다.
별로 빠른 진급을 못한채로 주로 유럽에서 꾸준히 복무해오던 Ike 는 제2차 세계대전중에 유럽의 미군사령관으로써 무공을 많이 세웠고 특히 그는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어려운 여건속에서 Normandy 상륙작전으로 독일군을 완패시켰었다. WW II 후에는 육군참모총장을 지낸후 1948년에 퇴역하고 Columbia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었다. 1951년에 NATO 군이 창설되자 다시 현역으로 소환되어 초대 NATO 군 사령관 으로 일하다가 1952년 6월에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공천을 얻기위해서 다시 퇴역 하였었다.
Ike 는 평생을 군대에서 보낸 무장이었 음에도 불구하고 군복보다는 양복이 더 어울린 다는 인상을 주었었으며 그의 대통령시절 8년중 6년간은 여소야대 이었던 까닭도 있었지만 타협을 잘하는 중도파 온건 정치인이 었었다고 생각된다. Ike 는 급했었다는 타고난 성질과는 전혀 다른 인상의 너그러워 보이는 큰미소를 잘 지었으며 부인 Mamie Eisenhower 도 인자한 할머니같은 인상을 주었었다. Ike 는 자기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너무 쉽게 자인하는 “솔직함”이 있어서 더러는 입장이 딱해 졌을때도 있었으나 그대신 국내외적으로 신임도가 높았었다고 한다.
그는 장군출신 답지않게 군비축소를 주장하였으며 퇴임시에는 “군부와 결탁한 재벌 세력” (Military Industrial Complex) 이 지방, 주, 연방정부등에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하였었다.
Domino Theory’ 로 세계공산화 흉모를 경계한 Ike”
Ike는 “여덟 백만장자들” 이라고 불리웠던 대기업의 유능한 사장들과 “수도관 수리공” 한명이 포함된 인사들로 첫 조각을 하였는데 그중에 Washington 의 유명한 변호사 John
Foster Dulles 국무장관을 포함하여 재무, 국방, 농무 장관들에 유능한 인사들이 기용되었 으며 민주당 소속의 Martin P. Durkin 이라는 Plumbers Union 간부는 노동부장관에 임명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기업가로써 성공한 사람들이면서도 비교적 참신한 인사들이었다. 대부분이 공화당 성분의 인사들이었던 까닭에 Durkin 노동장관을 제외하고는 Eisenhower 자신처럼 정부의 규모가 작아져야 하고 정부가 해오고 있던 많은 일들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도 하였었다.
국무총리가 없는 미국의 대통령제도에서는 요즈음의 Trump 대통령 처럼 정치경력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많은 부처들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고 백악관 자체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질서정연한 군대에 익숙해져 있던 Ike 에게는 유능한 비서실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었는데 Ike 는 비서실장에 전 New Hampshire 주지사 Sherman Adams 를 임명하였다.
Adams 는 대통령의 문앞을 지키고 앉아서 대통령을 만날 사람들을 통제하였었고 대통령이 꼭 보아야할 사항들을 정리해서 올렸었고 대통령의 귀와 눈 역활을 잘 해내었었다. Adams 가 유능했었던 탓에 대통령은 고립되기도 했었고 제안된 여러가지 정책중에서 대통령이 결정을 하기보다는 미리 선택된 정책만이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경향이 생길수도 있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너무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비서실장의 폐해도 나타나기 시작했었었다고 한다.
Ike 가 당면했던 제일 긴박한 난제는 한국전쟁 이었었다. 그는 선거공약대로 당선된지 한달안에 한국에 가서 최전선을 시찰하였었다. 그러나 Ike 인들 특출한 해결책은 없었었다. 일단 시작되었던 휴전회담은 1952년 10월에 중단 되었었다. 결국 미국이 중국을 폭격하고 한국에는 원자탄을 쓸수밖에 없다는 얘기들이 차츰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하자 휴전회담은 재개되었었고 전쟁전의 38 도선 비슷한곳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기로 하면서 1953년 7월 27일에 미국과 북한이 정전협정에 서명 하였었다.
이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얼마 동안 당시 중학생이 었던 필자는 “관제데모”로 동원된 전교생들과 함께 “북진통일”을 부르 짖으면서 피난수도 부산시내를 행진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미군 3만5천명이 전사하고 겨우 원상복구가된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결코 승리했다고 말할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원자탄전쟁은 피하였으며 아마 그것이 일단 세계인류의 승리였다고 말할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미국과 소련은 원자탄을 믿고 상대방을 협박 하면서도 전인류를 한꺼번에 몰살시켜 버릴수도 있는 그 원자탄의 위력에 서로가 질려서 막상 원자탄은 쓸수가 없는 “우스꽝스러운” 지경에 와 있었다. 전인류를 몰살시켜 버릴수도 있는 원자탄이 도리어 인류의 평화를 지켜준다는 논리가 되는 셈인데 국민을 총기살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서는 마구 떠돌아 다니는 총기를 없애야 한다기 보다는 국민들이 더 쉽게 강력한 총기들을 손에 쥘수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Trump 대통령의 발상도 “평화를 지켜주는 원자탄” 이라는 논리와 비슷한데가 있는것 같아서 곰곰히 생각해 볼수록 온몸에 닭살이 돋아난다.
한국전쟁의 종전으로 숨을 조금 돌리게된 미국은 정권의 교체와 함께 새로운 국제관계와 군사전략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Ike 는 균형예산주의자 이었었다. 균형예산을 위해서는 지출의 감소가 필수적인데 자연히 지출예산중 제일 덩어리가 큰 국방예산을 감축하여야만 하였었다. 그는 장군출신 답지않게 국방상태를 검토하고 군대의 규모를 줄이기로 작정하였다. 해외에 주둔해 있던 병력들을 미국으로 많이 불러 들이고 그대신 작아진 규모이지만 기동성이 빠른 군대로 재편성해 나갔었다.
병력의 감축으로 미국은 차츰 더 원자탄에 의존하도록 되어갔다. 미국은 드디어 1952년에 히로시마의 원자탄보다 500 배의 위력이 있다는 수소폭탄의 실험에 성공했다. 그러나 소련도 1953년에 수소폭탄실험에 성공하자 피장패장이 되어 버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ulles 는 만약 소련이나 중공이 어느 나라라도 침공하면 미국은 그들을 가차없이 응징할 것이라고 호통을 쳤었었다.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미국은 언제나 전쟁직전의 단계까지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국제관계가 마치 어린아이들이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정면으로 맞대보며 누가 먼저 눈을 깜작거리나 보는 기싸움을 하는 형국이되어서 Dulles 정책의 비판자들은 그의 정책을 “Brinkmanship” 이라고 비꼬아 불렀었다고 한다. 초기에 Dulles 는 앞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은 공산권의 확산을 방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미 소련의 통제 아래로 들어간 나라들을 해방시키도록 할것이라고도 하였었다.
Ike 는1954년의 연설에서 인접국가가 공산주의라는 병에 걸리면 그 다음국가가 전염병에 걸리는 것이 마치 일열로 세워놓은 domino 패들이 첫패가 넘어지면 모든 패들이 연속해서 넘어지는 것과 같다고 해서 소위 “Domino Theory” 라는 주장을 처음 내어 놓았는데 이것은 그후 미국외교정책의 원리나 되는것처럼 오랫동안 존중되었던 주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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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