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맹목적인 축적’이 부른 몰락

2018-03-21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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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결국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그를 국가지도자로 선택했던 수많은 국민들로서는 배신감과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각종 의혹들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이명박에게 표를 던졌던 것은 그가 내걸었던 허황된 장밋빛 경제공약들에 혹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부자인 이명박이 최소한 돈과 관련한 비리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란 믿음도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달리 그는 어느 대통령들보다도 탐욕스러웠다. 검찰수사와 재판과정을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과 혐의만으로도 그의 비리는 역대급이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마구 먹어치우는 불가사리처럼 ‘공천헌금’ ‘매관매직’ ‘당선축하금’ 등 명목과 액수의 다과를 가리지 않고 받을 수 있는 건 모두 다 정말 열심히 챙겼다. 도덕과 염치라곤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다. 자원외교 등 거대 비리의혹에 대한 본격수사는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기 전 이미 부자였다. 대통령 퇴임을 하면 국가에서 지급하는 적정선의 연금을 받으면서 편안히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차명으로 가지고 있는 재산도 만만치 않다. 평생 돈 걱정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이명박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욕심을 억제하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돈을 밝혔다.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 그가 자라온 환경 속에서 형성된 가치관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환경은 개인사적인 것이기도 하고 시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미 충분히 가졌음에도 쉬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속성까지 더해지면 탐욕에 브레이크를 걸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몇 년 전 행동경제학자인 시카고대학 크리스토퍼 시 교수 등이 저명 학회지에 발표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우리 인간에게는 소비할 수 있는 이상으로 쌓아두려는 뿌리 깊은 본성이 있으며 심지어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연구팀은 헤드셋을 쓴 피실험자들을 컴퓨터 앞에 앉히고 5분 동안 소리를 들려줬다. 이들은 아무런 보상이 없는 아름다운 음악과, 도브 초콜릿이 주어지는 귀에 거슬리는 소음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실험 전 이들에게 초콜릿을 몇 개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은가라고 물었더니 평균 3.75개였다.

실험이 시작되고 실제로 초콜릿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되자 피험자들은 소음의 고통을 견뎌가며 초콜릿 개수를 계속 늘려갔다. 이들이 얻은 초콜릿은 평균 10.74개였다. 하지만 정말 먹은 것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시 교수는 “이들의 노력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일단 발동이 걸리니까 멈추지를 못했다”며 이런 행태를 ‘맹목적인 축적’(mindless accumulation)이라고 불렀다.

맹목적인 축적은 왜 수조원의 재산을 가진 재벌들이 수백억원의 ‘푼돈’을 더 벌겠다며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다 쇠고랑을 차는지 설명해준다. 얼마 전 삼성 이재용 부회장과 비슷한 혐의를 받았던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이 구속되자 롯데그룹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탄식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스갯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롯데로서는 정말 돈이 없어 차별을 받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이처럼 부자라는 느낌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맹목적인 탐욕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명박의 등장과 몰락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일그러진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대중의 탐욕에 편승해 대통령이 됐으며 자신의 탐욕을 억제하지 못해 결국 나락으로 떨어졌다.

유명 투자자문가인 데이빗 겔러가 꼬집었듯 “많이 남기고 죽었다고 주는 상급은 없다.” 그 잉여 재산은 먹지 못한 초콜릿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모을 줄만 알았지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맹목적인 축적’이 안겨주는 불행감의 원천은, 바로 이런 잉여 재산을 결코 다 쓰지 못하고 죽을 것이란 억울함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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