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왕학의 함정

2018-03-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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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는 진(秦) 시황제(始皇帝) 등극(BC 221년)이후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가 퇴위할 때 까지(1912년) 557명의 황제가 등장한다.

이렇듯 왕조에서 왕조로 이어지는 것이 역사이다 보니 중국의 사상서라는 것의 대부분은 제왕학의 일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비자, 자치통감 등이다.

이 제왕학 중에 중요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관상학이다. 난세에 어떤 사람을 군주로 모셔야 하나. 반대로 어떤 사람을 신하로 뽑아야 하나, 이런 문제에 적지 않은 해결을 준다고 믿어진 것이 관상학이다.


관상학은 그러니까 전근대시대 중국의 지배집단의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 사고체계로도 볼 수 있다. 걸출한 인물로 난세를 평정하고 황제가 됐다. 그런 사람을 평가할 때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나오는 인물평은 그래서 이런 식이다. ‘제왕의 관상을 지녔다’-.

후주(後周)의 세종은 철두철미한 관상학 신봉자였다. 때문에 부하 장수 중 제왕의 관상을 지녔다고 보여 지면 반드시 주살했다. 자신의 제위를 찬탈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다.

그 후주를 뒤엎고 새로 왕조를 연 인물은 그러나 세종의 측근 무장으로 경호실장 격이었던 송 태조 조광윤이다. 나름 관상학에 정통하다고 자부했지만 후대 황제를 가까이서 키우고 있던 셈이었다.

이 제왕학이라는 것이 그렇다. 만고의 정치적 진리로 통하는 심오한 가르침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관상학이 첨가되고 온갖 권모술수로 일관된 후흑(厚黑)학이 덧입혀지면서 현묘하다 못해 상당히 황당한 예언서 비슷하게 둔갑하곤 한다.

고통 받는 민중을 대변해 일어섰다.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숱한 혁명가들 말이다. 그런 그들을 곧잘 파멸로 이끄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황당한 제왕학이기도 하다.

그 전형적인 케이스가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이다. 19세기 청 왕조 말기 농민들의 여망을 한 몸에 받았다. 지상에서 천국을 건설한다는 홍수전의 진군은 거침이 없었다.

그 혁명의 꿈은 그러나 그가 제왕학에 빠져들면서 와해되고 만다. 권력에 취했다. 결국 황제에의 욕심이 발동, 농민들의 여망을 배반하면서 참담한 운명을 맞는다.


그 제왕학에 심취했다. 그래서 혁명으로 점철된 중국 현대정치를 잠시 코미디로 전락시킨 인물이 있다. 위안스카이다. 1912년 쑨원에 이어 중화민국 대총통에 오른 그는 ‘황제가 될 사주와 관상’이라는 술사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급기야 그는 1916년 1월 공화정을 뒤엎고는 중화제국의 황제에 등극했다. 그의 재위는 그러나 거센 반대에 부딪쳐 81일 만에 끝나고 만다. 그는 만고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그 ‘위안스카이’란 단어가 중국에서 금지어가 됐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면서다. 그는 다름 아닌 시진핑이다.

왜 시진핑은 사실상의 21세기의 중국황제에 오르려는 것일까. 혹시 ‘황제가 될 관상에 사주를 지녔다’는 주변의 속삭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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