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타오르는 향기

2018-02-24 (토) 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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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원산지로 알려진 에티오피아를 다시 방문하였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아디스아바바에 세운 MMC 의과대학에서 나는 신장내과, 아내는 앨러지와 폐질환 과목을 학생들에게 강의하였다. 강의 준비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지만, 잘 볶아진 원두커피 색깔의 피부를 가진 에티오피아 학생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오전에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오후에는 병원에서 현지 의사들과 같이 환자 진료를 하였다.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지난날 내가 의과대학에 진학하도록 마음을 바꾸어 주었던 선생님, 이후 학교와 병원에서 평생 기억에 남는 몇몇 선생님의 주옥같은 강의 때문에 더욱 정진을 하였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환자들을 진찰하면서 현지 의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치료에 대한 계획을 같이 세울 때 인종의 벽을 넘어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었다. 황량한 아프리카에서 생수의 맛을 느꼈다.

의료 봉사하면 의료진들만 떠올리게 되지만 사실은 의사가 아닌 자원 봉사자들이 많이 있다. 의료 진료를 위해서는 많은 지원이 필요한데, 건물 관리, 자가 발전기와 전기시설관리, 산소공급, 각종 사무처리와 경리, 전산실 등 직접적 의료가 아닌 많은 일들이다. 모든 자원 봉사자들의 영양관리를 위해 부엌에서 봉사하며 싱싱한 야채를 공급하기 위해 농사를 짓는 분도 계셨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을 불태우는 분들의 헌신으로 의료진들이 많은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따뜻한 하루’라는 단체로 한국에서 오신 분들과 같이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이분들은 한국전에 파병되었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을 찾아 큰절로 인사드리며 위로하고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드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6.25 전쟁 참전국들 중 가장 용맹스러웠던 에티오피아군인 6037명의 강뉴부대는 “가서 싸워서 이겨라! 이기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라는 셀라시에 황제의 훈시로 253번의 전투에서 전승을 했다. 전쟁하며 받은 월급으로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위해 보육원을 만들었던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123명이 전사하고 단 한명의 포로도 없이 고국으로 돌아간 참전용사들은 우대를 받기는커녕, 1974년 들어선 공산 정권에 의해 반공주의자들로 몰리게 되었다. 가족 전체가 정치, 경제적 차별의 대상이 되었으며 후손들이 제대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따뜻한 하루’는 집단촌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강뉴 부대원 생존자 200여명과 가족들을 찾아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있었다.

진료를 받으러 온 분들 중에서 한국의 ‘코이카’ 소속으로 파견 나온 분도 있었는데 한국전 참전용사 후손들을 대상으로 직업 훈련을 하며 취업, 창업을 돕고 있었다. 또 그 선조들의 도움으로 한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자부심과 희망을 심어주고자 했다. 특정 대상자들은 한국으로 보내 훈련시키는 일을 정부와 협력해서 하는 것을 보고 자랑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커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오래 전 ‘칼디’라는 목동은 염소들이 어떤 열매를 먹고 나면 밤늦게까지 잠을 못 자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열매를 가지고 수도원 원장을 찾아가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원장은 분명 악마의 장난일 것이라며 열매를 불 속에 던졌다.

그러자 열매가 구워지며 아주 향긋한 냄새가 났다. 너무 냄새가 좋아서 그 열매를 갈아 물에 녹여 마셔보니 한밤중까지 정신이 또렷했다. 그 후 이 수도원 수도사들은 철야 기도를 할 때 이 열매로 만든 음료, 즉 커피를 마시고 밤새 맑은 정신으로 정진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커피열매가 불속에 던져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커피 향기를 맛볼 수 있었을까? 불속에 던져지면 대부분 타서 없어지지만 향기는 오히려 불속에서 퍼져 나왔다는 사실은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해 본다. 과연 나의 시간, 물질, 노력과 맞바꿀만한 것이란 무엇인가? 나를 태워서 낼 수 있는 향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은 어려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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