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총회는 1950년 10월 7일에 한국에 통일된 민주독립정부의 설립을 목적으로 하는 UNCURK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를 창설하였다. 그 다음날 UN군들은 38도선을 넘어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중공은 만일 미군이나 UN군이 38도선을 넘어서 북진을 하면 중공의 병력을 최전선까지 투입하여 북한을 방어하겠다고 경고하였다.
UN군측은 이 중공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않고 북한군들을 압록강 근처까지 밀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중공은 압록강 건너의 만주에 “자원의용군” 백만명을 주둔시켜 놓고 있었다. MacArthur 는 그후 수주동안 최전선에 참전하는 중공군의 병력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채로 북진을 계속하다가 급기야 1950년 성탄절까지 북한군을 압록강 저편으로 몰아내고 전쟁을 끝내겠다는 목적으로 추수감사절에 강공을 시작하여 두만강에서 60마일 지점까지, 서부 에서는 압록강에서 12 마일이 되는 지점까지 인민군을 몰아 대었다.
‘피리와 깽과리’ 로 무장한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과 MacArthur 장군의 해임
중공은 이미 경고하였던대로 압록강을 건너서 본격적으로 참전하였다.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될수도 있는 사태로 발전된 것이었다. 솜을 넣은 누비군복 한벌에 소총도 변변히 없이 “피리와 꽹과리만으로 무장” 한채 “인해전술” 만을 쓰는 “오합지졸” 이라고 비웃음을 받던 중공군에게 UN군은 풍지박산으로 수주동안 밀려 내려오다가 서울도 다시 내어주고 38도선 남쪽 60마일 지점에서 겨우 방어선을 유지하게 되었었다. 마치 궁지에 몰렸던 쥐의 반격에 혼비백산하여 정신나간것처럼 도망치던 고양이가 겨우 숨을 돌린 꼴이 되었었다. 전세가 완전히 달라진 전쟁으로 뒤바뀌었다.
미리 충분히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의 전개에 당황했던 MacArthur 장군은 이제 한국전쟁은 새로운 전략을 써야할 정도로 완전히 돌변했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제 미국은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고 중국본토를 폭격하며 대만의 장개석이 본토를 회복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 합동참모본부의장 Omar Bradley 장군은 “지금 중공과의 전쟁은 때에 맞지도 않고 맞싸워야할 적도 아닌 나라와 필요없는 전쟁을 하자는 것이다” 라고 잘라 말하면서 MacArthur 가 원하던 전쟁명령을 내려주지 않았다. 1951년 1월에 합동참모 본부는 MacArthur 장군과 미8군 사령관 Matthew B. Ridgway 장군에게 전쟁을 남한 영토내로 제한할것을 명령하였다. 합참은 두 장군들에게 중공과 전면전이 일어날수 있는 도전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미군은 중공군에게 최전선에서 많은 손상을 입히면서도 서서히 38도선쪽으로 후퇴해가고 있었다. 1951년 1월에 서부전선으로는 인천에서 43마일 남쪽으로, 중부전선에는 서울에서 46 마일 남쪽이 되는 지점까지, 동부전선은 38도선 바로 아래로 까지 후퇴해 있었다.
MacArthur 장군은 상당히 “건방진” 사람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 보는것이 소원이었다고 어떤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 증거로 그는 군에 있을때 pr 전문가들을 써서 그의 무공들이 알려지도록 하였었으며 WWII 의 태평양전쟁이 진행되고 있을때 있었던 1944년의 대통령선거때 공화당 보수파들이 그를 대통령후보로 밀었었으나 중도파인 Thomas Dewey 뉴욕 주지사가 공천되었다가 FDR 에게 낙선 되었었다.
MacArthur 는 1935년에 미육군 참모총장으로써 군대를 대폭 축소하려던 FDR 에게 백악관에서 거의 불경한 어조로 항의 하다가 FDR 의 경고를 받았던적이 있었고 1944년에는 전쟁중이라 Washington 에 갈수 없다고 하여 FDR 이 Hawaii 로 국무, 국방장관, 합참의장등을 대동 하고가서 전략회의를 한적도 있었다. “영웅”이라고도 불리웠었지만 일개 무장이었던 사람으로써 당돌한 처신이었다.
1880년생으로써 Truman 보다 4년 연상이었던 MacArthur 는 Truman 대통령에게는 더욱 사려없는 행동을 했다. 군경력으로 치자면 Truman 은 미육사에 지원했다가 시력이 아주 나빠서 낙방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으로 자원입대 했다가 포병소령 으로 제대한 Missouri 의 고졸 농부이었으며 그후 학원에서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민주당쪽 County Judge 로 12년간 근무하다가 1935년 초선 연방상원의원이 된 사람이다.
MacArthur 는 육사를 두번이나 낙방하고 세번째로 입학하였으나 졸업때는 일등으로 졸업하였으며 평균점수 98.37 로서 미육사 사상 세번째로 우수한 졸업생이었다고 한다. 미육사 도서관 정문앞에 타원형의 풀밭이 있고 풀밭 가장자리로 미육사출신 유명한 장군들 십여명의 흉상이 도서관을 향해서 세워져 있다. 일등를 했다는 MacArthur 장군의 흉상은 가운데쯤 도서관 정문앞에 세워져 있고 졸업생중 꼴지쪽에 가까웠었다는 George Patton 장군의 흉상은 저 멀리 도서관을 등을 돌린채로 세워져 있다. 사관생도들에게는 매일 교훈을 주는 익살스러운 예술작품이다. MacArthur 는 최연소 육사교장도 지냈는데 재직중 여러가지 개혁을 시도했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도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FDR 대통령을 Hawaii 까지 불러서 회담을한 경험이 있는 MacArthur 는 한국전쟁때에도 “시간이 없어서” Truman 대통령이 국방장관, 합참의장등을 대동하고 1951년 1월에 Wake Island 로 가서 그와 전략회담을 하도록 하였었다고 한다. Truman 을 수행한 합참의장 Bradley 장군은 MacArthur 가 대통령에게 경례를 하지않고 악수를 하였고 대통령이 회담후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자 선약 때문에 못하겠다고 해서 몹씨 당황하고 민망스러웠 었다고 회고한적이 있다 한다.
MacArthur 는 제한 전쟁전략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남한을38도선에서 방위하는데 그치면 남한이 항상 인접 공산적대국가의 위협속에 놓이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MacArthur 의 논리가 틀렸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군사령관과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차이로 볼때에는 그의 주장은 설계도에 따라 충실하게 집을 지어야할 목수가 도시계획을 비판하는 격이 었다고 말할수 있는 일이었다. Truman 은 전미국군 총사령관인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는 MacArthur 를 용납 하지 않았다. Truman 은 1951년 4월 11일 새벽 한시에 기자회견을 열고 MacArthur 장군이 직위해임이 되었음을 발표하였다.
MacArthur 장군은 미국에 돌아와서 방문한 San Francisco, Chicago, New York 등지 에서 군중들의 열열한 환영을 받았었고 그 자신은 자기가 영웅이 된것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4월 19일에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한 연설에서 “전쟁에는 승리이외 에는 별로 선택할만한 것이 없읍니다” 라고 얘기함으로써 Truman 에 대한 불만을 표시 하고 자신의 전략이 끝까지 옳다고 주장하였다. MacArthur 장군의 길고도 승승장구했던 군생활은 이렇게 끝났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에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에는 남한측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휴전선은 서쪽으로는 38 도선 20 마일 남쪽의 해안에서 시작하여 곧 판문점을 지나서 동쪽으로는 38도선으로부터 43 마일정도로 북상한 동해안에 이르도록 그어졌다.
MacArthur 의 강경파적인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았던 미국민들은 Truman 의 정책이 “상식” 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였 었다고 한다. 세계의 정세는 함부로 “승리” 라는 단어를 내뱉을수 없도록 되어 있었었다.
공산주의 소련도 원자탄을 보유하고 있는 현실에서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승자” 나 “패자”나 원자탄으로 전부 파괴되어 있을것인 까닭이다. Truman 은 “지금은 작은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순식간에 돌변 할수 있는 무서운 시대이다” 라고 말하면서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전쟁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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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