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백업 쿼터백의 반란

2018-02-10 (토) 실비아 김 현대오토에버 비즈니스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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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시즌에도 매주 게임을 챙겨 보는 미식축구 광팬이라서, 역사적으로 회자될 경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회사 동료들이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단순히 하프타임 공연을 보려고, 수퍼볼 광고들을 보고 싶어서… 등등 이유들은 다르지만 매년 슈퍼볼 경기가 있는 일요일이면 미국에서만 1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TV 앞에 모여 앉는다.

나의 경우 이민 첫 몇 해는 그냥 친구들과 모여 먹고 마시며 노는데 의미를 두고 수퍼볼 선데이를 기다렸다. 하지만,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몇 년이 지나자 경기 규칙도 알게 되고 팀이나 선수들에 대한 관심도 점점 커지면서 어느 순간 게임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올해는 5번이나 우승한 경력이 있는 막강 팀 뉴잉글랜드와 한번도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적 없었던 필라델피아의 경기라니 혹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기대감도 생겼다.

하지만 주변의 필라델피아 출신 친구들조차 필라델피아 이글스를 응원하면서도 사상 최강팀으로 평가 받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를 이길 수는 없을 거라며 크게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주전 쿼터백의 부재였다.


지난해 12월 무릎 부상을 당한 주전 카슨 웬츠 대신 백업 쿼터백 닉 폴스가 잘 하고는 있지만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한 레전드 쿼터백 톰 브래디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대다수 전문가들도 전체적인 전력에서 뉴잉글랜드가 앞선다며 그들의 통상 6번째 우승을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자 경기를 리드하는 건 오히려 필라델피아였다. 비록 마지막 4쿼터에 잠깐 역전을 당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게임 운영에서 앞서더니 결국 41대 33의 점수로 뉴잉글랜드를 이기고 수퍼볼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우승에 가장 큰 공을 세워 최우수선수 (MVP) 영예를 안은 것은 다름 아닌 백업 쿼터백 닉 폴스였다.

2012년 필라델피아 팀에 영입된 후 크게 부각되지 못하다가 다른 팀에 트레이드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던, 백업 쿼터백으로 다시 필라델피아 팀으로 돌아와서도 줄곧 은퇴를 고려해야했던 닉 폴스. 그런 그가 주전의 부상이라는 팀의 위기에서 이렇게 드라마틱한 반전을 선사하리라 예상했던 이들이 별로 없었기에 경기 직후 모든 관심은 혜성처럼 등장한 닉 폴스에게 쏠렸다.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며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을 향해 잘난 체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동안의 설움이 폭발해 오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닉 폴스는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며 ‘그동안 수없이 반복된 실패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그리고 오늘의 승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차분한 목소리로 수퍼볼 우승의 공을 팀 전체에 돌리면서 자신도 수퍼맨이 아니기에 매일 수많은 실수를 하고 하루하루 삶과 싸우고 있다고 고백할 정도의 내공이 만들어지는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며 견뎌냈을까.

몇 주 전 비즈니스 미팅 중에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카운터파트와 갈등이 있었다. 크게 우리 팀을 탓한 것도 아니고 프로젝트에 큰 영향을 줄 정도의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그래서 속으로 다른 팀원들을 원망하기도 하고, 좌절감에 빠져 회사를 그만둬야하나 잠깐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그 일에만 매달린 끝에 ‘덕분에 결과물의 성과가 좋아졌다’는 카운터파트의 감사 이메일을 받고 나서는 갑자기 기분이 방방 떠서 ‘역시 난 잘 할 수 있어’라는 자아도취 모드에 빠졌었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이렇게 일희일비하며 부질없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나이기에, 온갖 실패나 좌절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준 닉 폴스의 인터뷰는 그만큼 울림이 더 컸던 것 같다.

닉 폴스가 향후 필라델피아에 남게 될지 또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가 될지 은퇴를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실패와 좌절을 딛고 계속 성장해 나간다면 그 어떤 상황에 처하든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자기 인생의 ‘주전’으로서 씩씩하고 담담하게 삶을 잘 살아갈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팬으로서 나는 그런 닉 폴스를 줄기차게 응원할 것이다.

<실비아 김 현대오토에버 비즈니스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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