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겨울에’

2018-01-09 (화) 김남주(1946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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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에’

박영구,‘Reminiscence-clouds’

한파가 한차례 밀어닥칠 것이라는
이 겨울에
나는 서고 싶다 한 그루의 나무로
우람하여 듬직한 느티나무로는 아니고
키가 커서 남보다
한참은 올려다봐야 할 미루나무로도 아니고
삭풍에 눈보라가 쳐서 살이 터지고
뼈까지 하얗게 드러난 키 작은 나무쯤으로
그 나무 키는 작지만
단단하게 자란 도토리나무
밤나무골 사람들이 세워둔 파수병으로 서서
그 나무 몸집은 작지만
다부지게 생긴 상수리나무
감나무골 사람들이 내보낸 척후병으로 서서
싸리나무 옻나무 너도밤나무와 함께
마을 어귀 한구석이라도 지키고 싶다
밤에는 하늘가에
그믐달 같은 낫 하나 시퍼렇게 걸어놓고
한파와 맞서고 싶다

김남주(1946 -1994) ‘이 겨울에’

키 작은 나무들이 마을 앞에 옹기종기, 삭풍에 맞서있다. 그리고 거기 한 사람이 파수병처럼 서서 밤을 지킨다. 밤나무골, 감나무골 사람들은 좋겠다. 도토리나무, 싸리나무, 상수리나무처럼 조그마하지만 다부지고 의로운 사람이 척후병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으니까. 세월의 풍파를 그 누가 막아내 줄 수 있을까마는 이처럼 좋은 마음이 있어 세상은 훈훈하다. 꼭 나라를, 시대를, 마을을 구하는 큰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바른 마음, 맑은 마음 하나면 겨울밤은 어두워도 그다지 어둡지 않으리라. 임혜신<시인>

<김남주(1946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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