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자식 상팔자’의 유혹에 맞서

2018-01-03 (수) 조이스 리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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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식 상팔자’의 유혹에 맞서

조이스 리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연구원

김지영 씨는 출산과 동시에 ‘경단녀(결혼과 육아로 퇴사해 직장경력이 단절된 여성)’가 되었다. 시부모님도 친정 부모님도 ‘황혼 육아’에 뛰어드실 여건이 되지 않고 그렇다고 입주 도우미를 들일 여유도 없으니 달리 육아를 해결할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다. 김지영 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아이를 얻었지만, 동시에 몸과 마음의 병도 얻었다.

판매부수 50만부를 넘기며 1년 넘게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이다.

평범하디 평범한 30대 전업주부의 일상적 이야기가 한국사회에 이토록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김지영 씨의 고민과 갈등, 고통과 좌절이 나 자신 혹은 나의 가족, 친구, 이웃, 나아가 이 사회의 아픔으로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82년생 김지영 씨는 당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아이콘, 특히 결혼과 출산, 경력단절로 인해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여성의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이유 있는 ‘김지영 신드롬’ 덕에 더 많은 젊은이들이 ‘무자식 상팔자’의 유혹에 빠지진 않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불과 몇년 전 처음 등장한 ‘3포 세대 (경제적, 사회적 압박에 의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 라는 신조어는 이미 한국 청년세대에 식상하리만큼 보편화 된 키워드가 되었고, 일찌감치 딩크족 (Double Income No Kids: 삶의 자유와 여유를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 맞벌이 무자녀 부부)을 꿈꾸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어 최근 한 통계에 의하면 미혼 직장여성 10명 중 4명이 “결혼은 하더라도 출산계획은 없다”고 한다.

아이를 안 낳겠다는 결정은 개인의 가치관과 선택의 자유로 존중해야 하지만, 만약 낳고 싶어도 경제적, 사회적 부담감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경우라면 분명 정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할 몫이 있다.

2017년 대한민국의 출생아 수는 36만 명으로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2002년 50만 명 벽이 무너지며 합계출산율 1.17명으로 초저출산국 대열에 진입한 이후 15년 만에 40만 명 선도 붕괴되는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간 3차례에 걸친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과 출산율 제고를 위해 무려 200조원에 가까운 국고를 쏟아 부은 결과로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한국정부 나름대로 각고의 노력을 펼친 것은 사실이지만 출산율 제고라는 단기적 수치에만 집중한 정부의 출산 장려책은 뚜렷한 한계를 보였다. 특히나 정부 예산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만 0-5세 아동의 무상보육과 양육수당, 그리고 적게는 몇 십만원 부터 많게는 천만원대에 이르는 지역별 출산장려금 등의 현금지원 정책이 출산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며 정작 수령자인 부모들의 체감도도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출산과 육아, 일과 가정의 양립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가 돈과 시간이라면, 그간의 출산장려책들엔 시간적 측면에 대한 관심과 접근이 부족해 보인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신혼부부 통계>를 보면 결혼 5년 미만 초혼 신혼부부의 연소득이 높을수록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나 젊은이들의 출산 기피가 꼭 경제적 부담감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출산이 비단 양육비 문제 뿐 아니라 주거비 부담, 과도한 근로시간, 출산과 육아에 비친화적인 기업문화, 육아와 가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족원의 부재 등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이에 대한 대안 역시 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정부는 2018년 새해를 맞으며 결혼, 출산, 양육 단계별로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는 생애 맞춤형 지원 계획을 밝혔다. “82년생 김지영을 안아 주십시오” 라는 당부와 함께 책을 선물 받아 읽었다는 문재인 대통령은 기존의 저출산 대책 실패를 인정하며 “여성이 결혼, 출산, 육아를 하면서도 일과 삶을 지켜나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안정되고 평등한 여성 일자리 확충, 남성의 육아 참여 확대, 육아 기간 부모 근로시간 단축 등을 통한 여성의 ‘독박육아’ 해소와 삶의 질 개선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부디 무늬뿐인 정책,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하는 수박 겉핥기식 정책이 아니기를 바란다. 저출산 문제의 본질인 출산과 육아에 대한 두려움을 경감시키는 정책들이 발현되어 82년생 김지영도 92년생 김지영도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사회, 단순한 출산 장려를 넘어 일과 가정의 양립과 균형을 꿈꾸는 여성의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사회가 한걸음 가까워 오길 기대해본다.

<조이스 리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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