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의 기술

2017-12-30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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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가 또 지나갔다. 아무 일 없이 스르르 지나간 날들도 있었고, 지옥에 던져진 듯 가슴이 바작바작 타들어가던 날들도 있었다. 10월의 북가주 산불, 12월 남가주 산불의 이재민들은 지금도 어느 낯선 공간에서 돌아갈 집 없는 현실에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아무리 세상을 뒤흔들어도 개개인에게 가장 큰 일은 개인사.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 질병, 이혼, 실직 혹은 실연의 충격에 존재가 무너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하며 우리의 2017년은 지나갔다.

돌아보면 살아온 세월이 수십년이다. 매일 삶의 여인숙으로 찾아드는 기쁨, 슬픔, 분노, 절망의 손님들을 이제는 좀 다스릴 줄 알 때도 되지 않았을까. 손님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는 없을까. 축구를 하려해도 인스텝킥, 아웃프론트킥, 토킥, 힐킥 등 기술을 먼저 익히는 데, 삶에도 익혀야 할 기술이 있는 게 아닐까.

지난 주 한국에서는 27살의 재능 있는 음악인이 목숨을 끊었다.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리드 보컬이었던 종현이 ‘이제까지 힘들었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대한민국 어린이들의 장래 꿈이 연예인인 시대에 가장 빛나는 삶을 사는 듯 보였던 청년은 삶이 즐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K팝의 주인공인 아이돌은 지옥훈련의 산물이다. 곡예에 가까운 안무에 노래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실력은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기획사 연습생이 되는 데만 수천 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하고, 이어지는 혹독한 훈련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데뷔할 수가 있다. 아이돌로 무대에 서면 그때부터는 또 다른 차원의 생존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태산 같은 스트레스와 압박감,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청년은 감당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인생을 매트리스에 비유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트리스를 짊어지고 그 무게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매트리스 위로 훌쩍 올라앉으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젊은 음악인의 죽음을 접한 다음 날 어느 독자가 오피니언 지면에 글을 기고했다. ‘지금, 현재, 순간에 살자’는 김용민 씨의 글이었다. 글을 쓴 분은 가든 그로브에 사는 95세의 노인이라고 했다. 노인이 손으로 써서 어느 독서모임에서 발표한 글을 모임 관계자가 타이핑해 이메일로 보낸 것이었다.

“돈과 명예 모두 아침이슬처럼 사라지는 허무한 것들, 남을 배려하며 순간 순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글의 내용은 물론 문장의 구조, 표현 등이 반듯하고 정연했다. “정말 노인이 직접 쓰셨을까?” 궁금해서 통화를 해보니 사실이었다. 보청기도 쓰지 않는 노인의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로 청년처럼 힘이 넘쳤다.

1922년생인 그분은 1972년 미국에 출장을 왔다가 눌러앉았다. 나이 50에 뉴욕에서 일본식당 버스보이를 하며 영주권을 받고, LA로 와서 시청 공무원으로 17년간 일한 후 69살에 은퇴했다. 은퇴생활 26년, 그는 노년의 삶을 대단히 즐기고 있다.

생활의 두 축은 공부와 건강관리이다. 거의 매일 가든그로브 시립도서관과 LA 피트니스를 찾고, 강연회나 강의를 열심히 찾아다닌다. 젊어서 도쿄유학 시절, 전쟁 통에 공부를 제대로 못한 것이 늘 아쉬웠는데, 지금 그 한을 풀고 있다. 배울수록 새록새록 공부가 재미있어서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심신의 건강비결로 그분은 긍정적 사고, 낙천적 인생관, 그리고 부지런한 생활태도를 든다.


“전 세계 74억 인구 중 손금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마다 특별한 존재들이지요. 지구상에 나가 춤추듯이 즐겁게 살다 오라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라는 매트리스에 짓눌리지 않고 편안하게 올라앉는 법을 그분은 알고 있다.

UC 버클리에는 ‘그레이터 굿 과학 센터(GGSC)’라는 부설기관이 있다. 안녕과 행복에 관해 연구하는 기관이다. GGSC 연구에 의하면 안녕/ 행복은 연습하고 익혀서 얻는 기술이다. 감사를 연습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실천하며, 마음집중으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삶을 익히면 무거웠던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면서 평안과 행복이 찾아든다고 한다.

삶 혹은 행복의 기술을 익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며 웃는 것이다. 웃으면 뇌에서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분비되면서, 행복감을 높여주고 스트레스를 낮춰주며 면역기능을 활성화함으로써 장수를 돕는다. 거울 속 웃는 나를 보면 웃음의 효과는 배가한다고 한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 행복해지는 이치이다.

배우 황정민 주연의 영화 중에 “쇠문을 여는 건 큰 힘이 아니라 작은 열쇠”라는 대사가 있었다. 삶에 눌리지 않고, 도중하차 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내게 하는 것은 대단한 게 아닐 수 있다. 힘들 때 마다 허허 웃는 작은 미소, 그 긍정의 마음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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