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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87)제33대 Truman 대통령①

2017-12-22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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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87)제33대  Truman 대통령①
“하늘에서 달과 밝은 별들과 천체가 한꺼번에 내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으며 …” 라고 FDR 의 급서소식에 참담했던 심경을 토로하면서 미국민들의 기도를 부탁했던 Harry S. Truman 대통령은 1962년에 역사가들에 의해 최우수급 대통령으로 분류된 정치가이었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기전 까지의 경력은 별로 특출한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Truman은 Missouri 주의 Independence 에서 계속 빚에 쪼들리던 농장주의 아들로 살았던 까닭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은행직원으로 일한후 광산, 석유산업등에 손을 대었다가 실패 하였다. 같은 지역에 있었던 부농의 농장에서 노임을 받는 농부로써 일하면서 자기집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는 15년 동안의 끈질긴 구애, 연애끝에 그 부농의 큰딸 Bess Wallace 와 결혼하였는데 재산이 많은 지방유지로써 과부이었던 Bess 의 모친은 Truman 의 집안이 가난하고 그의 장래성이 신통치 않아 보여서 결혼에 반대 하였다고 한다. Bess 의 모친은 자기의 부친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은 사람이었었고 Bess 의 부친은 시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18세이던 때에 43세이었던 그녀의 부친이 5남매를 남겨둔채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하였는데 동네사람들은 Bessie 모친의 고약한 성깔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수군거렸었다고 한다. 후일 Bess 는 모든 정치현안들에 대해서 Truman 대통령의 충실한 상담자이었으며 겉으로 나타나기를 싫어 하였으면서도 대통령부인의 역할을 잘한 First Lady 라는 평가를 역사가들로 부터 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농부 Truman 은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포병소령으로 제대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 전후 불경기 중에 의류상을 하였는데 사업에 실패하였다. 야간에 공부를 하여 변호사가 되었으며 Jackson County 의 판사로 선출되어 12 년간 근무했었다.

Truman 은 성질이 급하고 독설도 서슴치 않고 별로 사교적이지도 못했던 까닭에 정치인으로 타고난 사람은 아니었으나 처가의 후원도 있었고 Missouri 주 민주당의 boss 였던 사람의 눈에 들어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서 연방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상원에서는 국방 programs 를 조사하는 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공평하고 성실하게 일을 했던 덕택으로 연방 정계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Truman 은 다소 치열했던 경쟁끝에 1944년에 FDR 의 runningmate 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5년 1월 20일에 부통령에 취임한 Truman 은 업무판단조차 제대로 할 틈이 없었던 82일 만에 FDR 의 급서로 4월 12일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부통령이었지만 대통령의 inner circle 에는 포함되지 않았던지 Truman 은 원자탄이 완성단계에 와 있었던것을 몰랐었다고 한다. 국내외 정세를 완전히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FDR 이 거의 끝내놓은 WW II 를 마감 시킬 책임이 Truman 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Truman 의 대정치가로 써의 결단력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통령이란 “내가 아직 사정을 잘 모르겠으니 조금 도와 주십시요” 라고 부탁할 수가 없는 자리인 것이다.

두번의 원자탄 폭격과 일본의 무조건항복
미국은 태평양과 거의 모든 섬들을 탈환하고 Okinawa까지 진격을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전사상자들이 많이 났었었다. 1945년 3월에 미국이 동경을 폭격하여 엄청난 파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군벌집권자들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제는 미군이 일본본토에 상륙하여 일본을 항복시킬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지을수 밖에 없었었다. 일본에 상륙할 경우에는 미군의 사상자가 10만명은 넘으리라는 추산이 있었다고 한다. Truman 이 이러한 전략상의 고민을 하고 있던중 7월 16일에 원자탄 폭발시험에 성공 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원자탄 사용여부를 결정할 권한은 대통령 에게만 있었다.

미국측의 추산으로는 미국이 상륙할 경우에는 미군 10만 여명을 포함해서 총 1백 만명의 사상자가 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원자탄을 투하할 경우에는 미군의 사상자는 거의 없고 일본인들 수십만명이 사상될 것이라는 추산이 나왔었다. Truman 는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1대1로 인간의 존귀성을 생각해 보자면 원자탄쪽이 존귀한 인간을 더 적게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결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 수십만명보다는 미군 10만명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모순된 논리가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7월 26일에 연합국 지도자들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으면 언청난 폭격이 있을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하였으나 일본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원자탄이 최종폭발 실험에서 성공한지 3주만인 8월 6일에 육체파 여성의 수영복차림의 모습을 “Enola Gay” 라는 별명과 함께 기수에 그려넣은 B 29 공군기 한대가 원자탄 한발을 Hiroshima 상공 580 미터에서 폭발시켜 섭씨 4천도의 불바다가 떨어졌다. 마치 원자탄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기나 하였던 것처럼 원자탄은 즉각 거침없이 쓰여졌던 것이다. 7만5천여명이 즉사하였고 나머지 25여만명은 원자병에 걸려 수십년간 고통을 받다가 사망했다.

연합국은 다시 8월 8일에 또 한번 경고한후 8월 9일에Nagasaki 에 두번째 원자탄을 투하하여 28만여명의 전사상자를 내었다. Nagasaki 폭격에는 조준이 조금 빗나가서 Hiroshima 보다 인명피해가 조금 작았다는 후문이 있다. 드디어 일본의 “천황”은 8월 14 일에 무조건 항복한다.

그무렵 미국민들은 일본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에 차 있었고 일본인들을 음해하는 각종의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있었다. 백인들이 혐오감을 표시하는 의미로 흑인을 “nigger” 라고 부를때에는 “멸시”하는 감정이 들어있지만 일본인을 “Jap” 라고 부를때에는 멸시 보다도 “증오감”이 더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반농담조로 미군들에게 “일본 여자들에게 접근하지 말라. 일본여자들은 미군 한명이라도 죽이기 위해서 수류탄을 꺼내서 자폭할 것이다” 라는 터무니없는 헛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Truman 이 얼마나 원자탄 투하 결정을 놓고 인간적인 번민을 했을까 하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번민끝에 그가 내린 결단이 정당한 것이었느냐에 대한 판단은 앞으로도 역사서에서 두고 두고 토론해 봐야할 일이다. 아시아 정치인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인도의 여자 수상 Indira Gandhi 가 1980년대쯤에 “미국의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는 인종차별의 결과이다” 라고 공언을 해서 잠시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 각자도 마음 깊이생각해 봐야 할 과제이다.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만일 외계에서 지구를 연구의 대상으로 관찰하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저 인간이란 동물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정기적 으로 서로 살육하는 이해할 수 없는 하급동물이다” 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WW II 중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서로 살육한 인간의 숫자는 대략 6천만명일 것이라고 한다.

혁신적인 새 약들이 사용되고 전쟁 중 처음으로 혈액은행도 사용되었으며 의학의 발달과 함께 의사와 간호사들의 헌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9만2천명의 전사자가 났는데 이 숫자는 WW I 때의 전사자 수의 다섯 배가 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미국의 전사자의 수효는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근소한 것이었다.

소련은 1800만명, 독일은 400만명, 일본은 200만명, 중국은 2200만명, 독일에 의해 Concentration Camp 들에서 살해된 천 만명 중에 유태인들이 600여만명 등등으로 전쟁사망자들이 추산된다고 한다. 일본의 200만명중에 조선인들이 몇명이나 포함 되었 는지 궁금하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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