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꽃 피는 공중전화’

2017-12-19 (화) 12:00:00 김경주(1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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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공중전화’

강영일,‘Overcome 1432’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조립식 벽 틈으로 스며들어온 바람
흐린 백열등 속에도 눈은 수북이 쌓인다
오래 된 번호의 순들을 툭툭 털어
수화기에 언 귀를 바짝 갖다 대면
손톱처럼 앗! 하고 잘려 나갔던 첫사랑이며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
가슴에 고스란히 박혀 들어온다
작업반장 장씨가 챙챙 골목마다 체인 소리를
피워 놓고 사라지면 여공들은 흰 면장갑을 벗는다
시린 손끝에 보푸라기 일어나 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뿌리내린 실밥들 삐뚤삐뚤하다
졸린 눈빛이 심다 만 수북한 머리칼 위로 뿌옇다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
라디오의 잡음이 싱싱하다

김경주(1976- ) ‘꽃 피는 공중전화’

고달픈 여공들의 삶, 그 따스한 내면이 눈에 보일 듯 그려져 있다. 함박눈이 내리는 밤, 야근 중인 여공들은 쉬는 시간이면 공중전화로 달려갔을 것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추억의 공중전화, 그것 하나가 그들의 위안이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짠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어린 여공들은 저처럼, 먼 어딘가로 소식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병든 어머니, 어린 동생 혹은 떠나간 연인들에게. 누가 그들의 생을 보듬어 줄 것인가. 꽁꽁 얼어붙은 12월의 거리. 통화 하나 하나마다 저 스스로 한 송이 꽃처럼 피었다 지는 아름답고 순정한 풍경이다. 임혜신<시인>

<김경주(1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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