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상처가 시리고 아픈 계절에

2017-12-16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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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러데이 시즌을 맞아 TV 광고들이 눈길을 끈다. 대부분 ‘징글벨 ~ ’ 분위기의 들뜬 광고들인데 유독 독일에서는 매년 색다른 광고가 등장한다. 수퍼마켓 체인인 에데카(Edeka)의 2015년 광고가 대표적이었다.
주인공은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노인. 매년 성탄절이 되어도 자녀들이 바쁘다며 집에 오지 못하자 노인은 ‘묘안’을 낸다. ‘부친 사망’ 소식을 자녀들에게 전한 것이었다. 슬픔과 후회, 죄책감에 싸여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집으로 달려온 삼남매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맞는다. 아버지가 만찬을 준비해 놓고 건강한 모습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노인과 자녀, 손자손녀 3대는 오랜만에 한자리에 둘러앉아 먹고 마신다. 적막하던 집안이 웃음과 이야기 소리, 활기로 그득하다.
올해는 독일의 또 다른 수퍼마켓 체인인 페니(Penny)의 광고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번에는 중년부인이 주인공이다. 어스름이 내려앉는 시간 부인은 고요히 서서 바깥을 내다본다. 그리고는 오래 문이 닫혀있던 빈 방으로 들어선다. 오래 전 그 방안에서 벌어졌던 일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엄마와 딸이 격렬하게 언쟁을 하고 만삭의 몸인 딸은 집을 나간다.
옛일을 회상하던 부인은 결심을 한 듯 집을 나선다. 폭설로 대지는 온통 새하얀데 부인은 발을 잘못 디뎌 물에 빠지고, 산속에서 늑대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력을 다해 캄캄한 어둠과 거센 바람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자 젊은 여성이 문을 연다. 눈물이 그렁그렁 해진 딸은 엄마와 오래도록 포옹을 한다.
집안에서 아이 뛰노는 소리가 들리며, 딸이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운 오랜 세월 모녀는 인연을 끊고 살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진짜 클라이막스는 그 다음에 등장한다. 카메라가 멀리 물러나면서 두 집이 나란히 잡힌다. 엄마의 집과 딸의 집은 불과 몇 백 미터 안 떨어진 이웃집. 부인이 산 넘고 물 건넜던 험난한 여정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심리적 격랑의 은유적 표현이었다.
실망과 분노, 미움과 배신감으로 한번 마음의 문이 닫히면 그 문을 다시 여는데 그렇게도 큰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크린 가득 메시지가 나오면서 광고는 끝난다. “그 길이 아무리 멀어 보여도, 지금은 크리스마스. 화해할 때입니다.”
마음의 상처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가장 아프다는 것, 그래서 가장 깊은 상처는 대개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라는 것, 그런 상처는 저절로 아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가족들이 모이는 할러데이 시즌이면 상처가 가장 시리고 아프다는 것 등이다.
가족관계 전문 심리학자인 레너드 펠더 박사에 의하면 가족으로 인한 상처가 없는 사람은 전체의 1/4에 불과하다. 3/4 정도는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로 인해 상처를 받으며 산다. 부모나 자녀 혹은 형제자매가 특별히 가혹해서라기보다는 가족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우리에게 특별히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이를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으로 설명한다. 공통점이 많은 사람들 사이일수록 작은 차이점이 크게 부각되면서 분노와 적개심을 유발시키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옆집 아이가 비뚤어진 행동을 할 때면 ‘그 나이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너그럽게 이해가 되면서도 내 판박이인 내 아이가 같은 행동을 하면 실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아울러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갖는 기대와 보상심리가 작용하면서 실망은 때로 관계를 아예 끊는 극단으로 치닫기도 한다. 페니 광고의 엄마와 딸 케이스인데, 비슷한 예는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얼굴을 안 보고, 형제가 한 자리에 모이지 않는 가족들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렇게 남이 되어 마음이 편하면 좋겠지만 대개는 스스로 만든 상처를 스스로 찌르며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가족의 인연은 끊는다고 끊어지는 게 아니다.
성탄의 계절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왔다.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을 용서함으로써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라고 아기 예수는 말한다.
용서란 페니 광고의 엄마처럼 죽을힘을 다해 산 넘고 물 건너는 멀고도 험한 길. 하지만 미움 대신 기어이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이다.
갈등 없는 가족은 없다. 갈등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다를 뿐이다. 상처가 유난히 시리고 아픈 이 계절에 아직도 해결 안 된 상처가 있다면, 용서하고 화해하자. 평안과 행복이 선물로 찾아들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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