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유가 불편한 사람들

2017-12-13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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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오랜 기간에 걸쳐 대규모 도핑조작을 해 온 러시아에 대해 평창올림픽 출전금지조치를 내렸다. 정보국 등 정부기관들이 총동원된 러시아의 도핑조작은 규모와 수법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상식적인 국가라면 이런 스캔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비상식적이고도 더러운 이런 부정행위가 국가의 주도 아래 저질러졌다. 냉전시대에서나 있을 법한 스캔들이 21세기에 터져 나온 것은 현재 러시아의 정치 환경과 무관치 않다. 17년 전 푸틴이 권좌에 오른 이후 러시아는 급속히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길을 걸어왔다. 푸틴의 집권기간은 전후 최장이었던 브레즈네프의 기록을 이미 넘어섰다.

푸틴은 ‘위대한 러시아’를 내세우며 러시아 국민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올림픽과 월드컵 같은 메가 스포츠 이벤트 유치와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통해 국민들의 자부심을 한껏 자극하면서 내부 결속을 다져왔다. 국영매체들은 푸틴 찬양을 통해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를 고착시키는데 열심히 부역하고 있다. 도핑조작은 이 같은 국가주의의 강박이 낳은 일탈이라고 보면 된다.


푸틴의 등장과 장기집권의 전 과정은, 자유를 얻는 것 못지않게 이것을 잘 간직하고 지키는 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소련 체제가 무너진 러시아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설렘이 넘쳤다. 하지만 구소련 붕괴로 인한 질서의 공백 속에서, 과도기적 혼란과 자유에 적응하지 못하는 러시아 국민들이 늘었다.

러시아의 작가이자 사회학자인 알렉산드로 지노브예프가 지적했듯, 러시아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형성된 ‘소비엣 인간’(Homo Sovieticus)의 DNA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소비엣이라는 정치체제는 붕괴됐지만 그 시절에 대한 향수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러시아의 국가적 정서를 살피는 척도로 자주 인용하는 것이 ‘스탈린 바로미터’(stalin barometer)이다. 철권통치의 상징인 스탈린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보면 그 시점의 국민의식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제 붕괴라는 혁명적 기운이 휩쓸던 지난 1989년 스탈린을 긍정 평가한 러시아 국민은 단 9%였다.

그랬던 것이 2003년 40%로 뛰더니 지금 스탈린은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러시아의 위대함을 이끌었던 지도자로 재조명되고 있다. 국영매체들이 이를 위해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가주의 정치를 펴고 있는 푸틴이 70~80%를 넘나드는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러시아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칼럼니스트 수잔 글래서는 금년에 출간한 책 ‘The Future is History: How Totalitarianism Reclaimed Russia’에서 “지금의 정치 상황으로 볼 때 러시아의 미래에 희망은 없다”고 단언했다. ‘미래는 역사’(The Future is History)라는 제목 자체가 러시아 대한 사망선고라 할 수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러시아의 미래가 어두울수록 푸틴의 미래는 밝다는 사실이다. 국가주도 도핑조작이 터지면서 내년 대선출마를 선언한 푸틴의 당선가능성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도핑조작 징계를 IOC의 정치공작과 러시아에 대한 핍박 프레임으로 활용하면서 국민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을 얻고 제대로 향유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혼란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사회와 국가는 온전한 자유의 단계로 나가지 못한 채 주저앉게 된다.

억압과 통제 속에 오래 놓이다 보면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능동적 자유가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진다. ‘학습된 수동성’ 때문이다. 현재가 곤고할수록 억압적이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퇴행적 정서는 더욱 고개를 든다. 러시아의 현 상황은 이런 정서가 만만치 않은 한국에도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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