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핵 보유국이 된 북한

2017-11-3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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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지만 아시아에서는 동남아와 태평양의 섬들을 모두 잃고도 일본은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있었다.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 침공이 불가피한데 그럴 경우 100만 명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란 것이 연합국 사령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후 사흘 뒤 미적거리고 있던 소련군은 관동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그 수 시간 후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됐다. 그 뒤 1주일도 안 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당시 33살로 소련군 장교였던 김일성에게 원자탄의 힘은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수십년간 떵떵거리던 대일본 제국이 단 두 발로 무릎을 꿇는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60년대 초부터 핵 개발을 최우선 사업의 하나로 정하고 추진해 왔다. 1963년 북한은 소련에게 핵 무기 개발 협조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했고 중국에도 같은 요청을 했다 역시 거절당했다. 대신 소련은 평화적인 핵 발전은 돕겠다며 1963년 영변에 세워진 핵 발연구소 건설에 기술자를 보내줬다.

북한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79년 영변에 제2의 원자로 건설에 들어갔고 이를 발판으로 80년대부터 본격적인 핵 무기 개발에 나선다. 1993년 국제 원자력 기구가 북한이 비확산 조항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내놓자 감사를 거부하고 NPT 탈퇴를 선언한다.

이로 촉발된 북한 핵 위기 해결을 위해 경수로 건설과 중유 제공을 대가로 핵 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제네바 협정이 타결된다. 그러나 상호 비방 속에 2002년 이 협정은 파기되며 2003년 북한은 다시 NPT를 탈퇴한다.

2006년에는 처음으로 지하 핵 실험에 성공하며 2007년에는 6자 회담 끝에 핵 개발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지만 2009년 2차 핵 실험을 한다. 2012년에는 다시 핵 개발 중단을 선언하지만 2013년에 3번째 핵 실험을 한다. 그리고는 2016년 1월과 9월에는 수소탄 폭발 시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다.

북한은 지난 수십년간 핵과 함께 미사일 개발에도 총력을 기울여왔다. 그 북한이 28일 동해 상에 ICBM을 쏴 올리고 “핵 무력 완성의 대업, 로켓 강국의 위업이 실현됐다”고 선언했다. 이번 미사일의 사정 거리는 8,000km이상으로 추정되며 워싱턴 DC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북한은 이번 미사일을 쏘고는 “세계 평화와 안정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말을 풀어 보면 자신들의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해야 한반도에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으로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며 중국에 석유 공급 중단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중국이 이를 들어줄 지는 의문이다. 북한이 무너져 미국 세력이 압록강까지 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제재를 더 강화한다고 하는데 지난 수십년간 제재를 견디며 여기까지 온 북한이 이제 와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낮다. 미국의 체제 보장 약속에도 불구하고 핵을 포기한 사담과 가다피가 어떻게 됐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과 중국, 북한 사이에 낀 한국이다. 다들 핵이라는 큰 칼자루를 쥐고 버티고 있는데 세 나라 눈치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참으로 딱하다. 독자적 방위 능력 없는 나라는 영원한 찬밥이라는 사실을 북한 사태는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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