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원한 젊음이라니

2017-11-18 (토) 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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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설거지를 할 때였다. 불빛이 반사된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거울을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문득 마사지 팩 생각이 났다. 그게 이름이 뭐였더라, 저녁을 먹으면서 본 TV 광고를 기억해두려고 귀담아 들었는데 이름이 도무지 생각나질 않았다. 그저 얼굴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초간편 마사지 팩이라는 바람에 솔깃했었는데. 처진 피부가 탱탱해지고 주름도 펴진 전 후 사진을 비교하며 보여주던 광고였다.

젊어지다니, 세월이 거꾸로도 흐르나 하면서도 혹시 모르니 이름이라도 외워둬야지 싶어 입 속으로 몇 번씩 따라 하기까지 했었다. 자연스럽게 늙어가기보다는 인위적으로라도 젊게 보여야 아름답다고 느끼는 시대를 살며, 믿어지지 않는 효능을 어떻게든 믿고 싶었던 것일까.

마침 읽고 있던 책이 영원한 젊음을 꿈꾸는 젊은이에 관한 내용이어서 관심의 촉수가 그리로 향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펼치다가 나도 모르게 일어나 돋보기를 쓴 채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웬 낯선 여자. 내가 책임져야 할 얼굴이 저 얼굴이었나 싶었다. 시간이 얼굴에 긋고 간 흔적을 굳이 돋보기로 확대해서까지 볼 필요는 없었는데, 어쩌자고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한 것인지.


몸은 가꾸는 만큼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은 열정이 있어야 늙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균형 있게 늙어가는 것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쓸쓸한 마음으로 책상으로 돌아와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영혼을 판 대가로 주인공 도리언은 영원한 젊음을 누리고, 대신에 자기 초상화가 늙어간다는 내용이다.

그 거짓말 같은 기적이 현실로 나타나자, 더는 자기 얼굴에 책임질 필요가 없어진 그는 죄의식 없이 악행과 방탕한 생활로 청춘을 탕진한다. 놀랍게도 그가 타락하는 정도에 따라 초상화 속 도리언 얼굴이 추하게 늙어가고 실제 도리언은 젊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살아간다.

쾌락에 물든 겉껍질뿐인 자아와 자신의 영혼을 담은 일그러진 초상화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도리언. 그는 진실한 사랑 앞에서 마침내 변하기 시작한다. 한 순박한 시골 처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도리언은 자기 영혼을 구해준 그녀와 사랑을 나누며 때늦은 후회와 반성을 거듭하지만, 제 주인의 삶에 책임져야 하는 초상화는 차마 보기 어려우리만치 추한 모습으로 바뀐 뒤였다.?

절망하던 그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자기 초상화를 없애버리려 한다. 그러나 초상화에 꽂은 칼이 느닷없이 자기 자신의 심장을 향할 줄이야.

칼을 맞은 도리언은 갑작스럽게 흉물스러운 늙은이로 변해 쓰러지고, 그가 쓰러져 누운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빛나는 젊음과 진정한 아름다움을 되찾은 청년의 초상화가 남는다. 결국,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은 것이다. 예술을 생활보다 우위에 두던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등장인물을 통해 전하고 있다.

젊음과 미모를 지키고 싶은 욕망에 눈이 멀어 악행을 저지른 데 대한 책임을 묻는 결말에 내 마음이 복잡했다. 작가는 도리언에게 늙고 추한 죽음을 안기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영원한 젊음을 탐하는 욕망 자체는 악행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작가는 젊음을 지키고자 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범행을 벌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어리석음과 악행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물으려 했을까.

영원한 젊음을 간직하려는 영혼 없는 젊은이의 부질없는 몸부림은 그렇게 비극을 맞으며 막을 내리고, 영혼을 담은 초상화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영혼 없는 아름다움의 허망함이라니. 젊음이든 미모든 끝이 없이 영원하다면 굳이 애써 지킬 필요도 집착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한시적이기에 더 애틋하고 아쉬움을 갖게 된다는 이치를 모르랴마는.

영원한 사랑, 영원한 우정, 영원한 삶…. 우리가 영원이라는 단어에 애착을 갖는 건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젊음도 아름다움도 한 순간에 지나가고, 우리 삶도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경계를 지나게 됨을 알기에 지금 순간들이 더 빛나고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리라.

<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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