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감세 논쟁’의 본질

2017-10-04 (수) 조윤성 논설위원
작게 크게
트럼프 대통령이 법인세 대폭 인하와 과세구간 단순화, 상속세 폐지 등을 골자로 한 감세안을 지난주 발표했다. 법인세는 현행 35%에서 20%로 낮추고 최고소득세율도 현재 39.6%에서 35%로 낮추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7단계로 돼 있는 과세구간도 3단계로 줄여 세금보고를 단순화하겠다고 밝혔다.

감세안을 발표한 트럼프와 공화당은 그러면서 감세안의 혜택이 노동자 계층에 돌아갈 것이며 부자들은 거의 혜택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알아차리는 데는 대단한 지적 수준이나 이해력이 필요치 않다. 이들이 입에 올린 노동자 계층은 부자들에 쏠릴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어차피 법인세는 일반 납세자들과는 별 상관없는 기업가들과 주주 등 부자들의 영역이고 상속세 폐지로 누가 최대 수혜자가 될지 또한 너무 뻔하다. 한 신문은 감세안이 시행될 경우 트럼프 일가가 절감하게 될 세금이 11억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감세안에 ‘셀프감세’라는 비판이 뒤따르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부자들에게 큰 덩어리를 안기고 서민들에게는 부스러기를 던져주면서 커다란 시혜라도 베푸는 양 생색내는 태도가 너무 위선적이다.


트럼프 감세안은 불합리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감세안이 시행될 경우 불평등이라는 미국사회의 심각한 병증이 한층 더 깊어질 것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위대함을 위협하는 것은 이민이나 테러가 아니라 이런 내부의 불평등 현실이다.

어떤 주장을 논증하는 데 역사적 경험만큼 강력한 논거는 없다. 조세정책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그 결과 유례없이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됐던 1970년대 미국은 사회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진보를 성취했다. 정치적으로 깨어있는 중산층은 보수에게 언제나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부자감세에 집착하는 보수의 성향은 한국과 미국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 트럼프가 감세안을 발표하자 한국의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이 뉴스를 법인세를 현행 22%에서 25%로 올리려 하는 문재인 정부에 제동을 거는데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아직 트럼프 감세안이 통과된 것도, 문재인 법인세가 확정된 것도 아닌데 “한미 법인세 역전”이라는 타이틀까지 달면서 딴죽을 걸고 있다.

보수의 감세 옹호, 증세 반대 논리는 이렇다.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 주면 이 돈이 경제에 다시 흘러들어가면서 성장을 이끌고 그 결과 세수가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논리로는 그럴 듯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이명박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며 법인세를 대폭 낮춰줬지만 성장은 온데간데없고 기업 금고에 천문학적 액수의 현금만 쌓였을 뿐이다. 미국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작은 정부를 내세우는 보수는 통상적으로 국가부채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트럼프 감세안이 시행될 경우 세수손실은 향후 10년 간 2조달러로 예상된다. 그런데 오바마 행정부 시절 국가부채를 비판하며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공화당 의원들이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기묘한 침묵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 감세안은 ‘단순화’라는 프레임으로 조세정의의 근간인 누진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공정성은 마치 아름다움처럼 주관적 개념이어서 경제학자들은 이 말을 입에 올리기 꺼린다. 하지만 현 세금제도의 불공정성은 너무나도 뚜렷하기 때문에 이를 달리 표현하는 건 그 자체가 기만”이라고 비판한 것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였다.

때마침 지난주 미국경제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게 무엇인가를 묻는 설문조사가 실시됐다. 북한을 고른 사람이 24%였고 10%는 금리인상을 지적했다. 가장 답이 많았던 것은 36%가 꼽은 ‘워싱턴의 정치 환경’이었다. 트럼프 감세안에서는 미국경제와 사회의 건강성에 관한 고민이나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왜 그토록 많은 미국인들이 워싱턴 정치를 부정적인 요소로 여기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윤성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